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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교제] 현장이탈 목회자

    • gtbc (gtbckim)
    • 2021-12-27
    • hit1441

    안부

    오랜만의 소식이 궁금해서 전화를 걸면 반갑게 전화를 받기에, 요즘 목회 현장은 좀 어떤지 물으면 갑자기 목소리에 기운이 빠져 묻는 이가 민망해진다. 미자립교회 상당수의 목회자가 목회현장을 벗어나 투잡의 현장에 있다. 학부부터 신학을 전공하고 전형적인 목회를 해온 이들은 특별한 기술을 갖지 못한 경우가 많아 그들의 투잡 현장은 주로 인테리어나 노동의 현장이다. 감사하게도 어떤 분들의 경우는 생각보다 괜찮은 반응을 나타내기도 한다. 힘겨운 목회 현장에 매여있을 때는 이것 저것 눈치보는 일도 많았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재정적으로 늘 쪼들리는 상황이었다. 재정적 압박이 더 이상 견디기 어려운 상황에서 선택한 노동현장은 모두가 그렇듯 처음엔 노동의 강도를 견디기 쉽지 않았지만 적응되어가면서 수입도 괜찮아지는 경우가 있다고 한다. 물론 지속적으로 할 수 있는 일이 있다면 괜찮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들도 많다. 알바를 전전해야 한다.

    노동을 하면서 그것이 나쁜 것은 아니지만 목회에 전념하지 못하는 것에 대한 미안한 마음을 표현하는 이도 있다. 그리고 뜻밖에도 노동현장을 통해 목회현장에서 얻은 수입보다 더 많은 수입을 올리다 보니 가끔은 다시 목회에 주력하게 될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는 반응도 있다. 여러 사람이 이렇게 말하는 것을 들었는데, 차라리 수입이 생기니 마음은 편하다는 것이다. 역시 목구멍이 포도청이라고 했던가? ㅎ

    사명으로 알고 시작한 목회였는데, 목회 현장을 벗어나 수입이 생기니 편해진다는 것이 참.. ㅎㅎ 섬김도 내 주머니가 넉넉해야 마음 편하게 할 수 있는 일인가 싶다.

    이 사람 저 사람 눈치 보아가며 불편하게 생활해야 하는 것보다 비록 조금 힘은 들지만 내가 수고한 것으로 수입을 얻고, 비록 많은 성도는 아니지는 예배인도를 위해 성도들 앞에 설 때에 면목이 선다는 눈치다. 이제 여기 저기 손벌리지 않아도 되고 때론 얻어먹기만 하던 밥도 좀 사면서 사람 사는 것처럼 느껴지는 것이 사실이지만 처음 노동현장에 들어서기까지가 좀 힘들었다고 한다. 그럴 때 우리 교육원의 목사님 중에서도 노동현장에서 수고하는 분들이 계시다며 이분들의 이야기를 전하면 그 말에서 힘을 얻는다는 분도 있다.

    팬더믹 이후 문을 닫은 교회가 1만 교회가 된다. 문을 닫은 사정이야 말하지 않아도 잘 알 수 있고, 성도는 없는데 월세는 계속 나가야 하니 어떻게 교회를 유지할 수 있겠는가? 모처럼 통화하며 서로의 안부를 묻다가 울기도 하고 웃기도 하는 상황들이 반복된다. 이 시련의 시간이 어떤 목회자에게는 눈을 뜰 수 있는 계기가 되고 어떤 이에게는 여전히 헤어나기 힘든 고통의 시간이 되고 있다. 

     

    문닫는 교회

    본인의 의지가 아닌 시대적 현상으로 현장이탈을 할 수 밖에 없는 목회자는 우선 급한대로 직업을 알아보기도 하지만 기도와 끈기로 버텨내려는 이들도 있다. 어떤 결정이든 존중하고 어떤 상황에서도 끝까지 이기고 더 나은 상황들이 주어지기를 바라며 기도할 뿐이다. 부교역자로 섬기던 교회로부터 물러나 쉬고 있는 분들도 있다. 섬기던 교회로부터 재정적 지원을 받아서 개척할 수 있는 부교역자도 있으나 그렇지 못한 목회자가 더 많다. 요즘 같은 경우는 개척이란 꿈꾸기도 쉽지 않다. 어떤 이유로든 교회로부터 이탈한 목회자들의 마음은 기존 교회에 대한 또 자신을 내보낼 수밖에 없었던 목회자를 비롯한 대부분의 기존 교회에 대한 불편한 감정들을 갖게 된다.

    사실 문닫는 교회가 많아지면 그만큼 교회에 대한 적극적인 부정적 사고를 가진 이가 더 많아질 수 있음을 배제하기 어렵다. 그들의 영향력이라는 것도 결코 가볍지 않다. 그들 주변에 쌓이는 부정적 영향력의 전파력은 기존 교회에 거대한 부담이 될 수 있다. 이탈자들 중 상당수의 마음에 기존 목회자들에 대한 신뢰가 바닥인 경우가 많다. 하기사 기존 교회들조차 자신을 제외한 다른 목회자에 대한 신뢰가 그리 깊은 것은 아니다. 마치 도로 위의 모든 운전자에게 나 이외의 다른 운전자가 적이 되듯 자신의 교회 이외의 다른 교회는 신뢰의 대상이 아닐 수 있다. 그래서 설교 중 가끔 하는 말이 (자신을 제외한) 한국교회 목회자들이 어쩌고 저쩌고 하지 않는가 말이다. 하물며 교회로부터 어떤 이유로든 이탈한 목회자가 기존 교회에 대해 곱게 바라볼 일은 흔치 않다.

     

    상처입은 하나님의 나라

    교회는 곧 하나님 나라의 지상 버전으로 이해하는 이들이 많지만 과연 그럴까.. 교회가 하나님의 거할 성전이라고 에베소서는 말씀하고 있지만 정말 이 땅의 교회들이 하나님께서 거하시는 성전으로 불려도 괜찮을까.. 그 누구도 쉽게 "예스"라고 대답하기 힘들다. 당연히 교회가 하나님의 나라가 아니라 하나님의 통치 아래 있는 자들이 "하나님의 나라", "하나님의 백성"이다. 교회라는 이름으로 모였지만 하나님의 통치 아래 있는 이가 있는가 하면 그렇지 않은 나라도 있기 마련이다. 정작 교회는 "하나님 나라의 모형"이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 나라 백성 다움을 배우고 회복해야 하는 곳이다. 육적 공동체이면서 또 영적 공동체여야 하는 것이다. 이 하나님의 나라는 지속적으로 그리스도의 빛을 세상에 발하고 지속적인 확장성을 가져야 한다. 그런데 비대면 시대가 되었고 이 확장성에 심각한 제한이 생겼다. 어떻게 해야할까.. 하나님 나라의 확장성은 전도라는 방법을 사용하기도 하지만 성도들의 삶에 나타난 영향력이 미치는 확장성이 가장 효과적이라 할 수 있다.

    비대면은 정말 많은 사람들을 힘들게 하고 고통스럽게 한다. 이때 하나님의 나라 거룩한 백성들이 사랑의 마음으로 주변에 따듯한 정을 나누면 어쩌면 새로운 교회의 도약으로 하나님의 나라의 확장으로 이어질 수 있지 않을까? 영국의 축구선수 손흥민은 실력도 실력이지만 그의 따듯한 마음과 미소에 온 세계가 열광하고 있는 것처럼 모든 성도의 작은 실천과 미소가 미칠 하나님의 나라에 미칠 영향력은 지대하다 할 수 있을 것이다.

    내가 힘든만큼 다른 이들도 힘들다. 내가 아픈만큼 다른 사람도 아프다. 내가 위로받고 싶은 만큼 다른 사람들도 위로 받고 싶어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모범을 따르는 교회 곧 성도들이 빠른 전파력으로 많아지기를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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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나눔] 팬더믹 앞에 교회의 대처는

    • gtbc (gtbckim)
    • 2021-12-26
    • hit1899

    코로나와 함께 일 년

    새해 첫 예배에서 "포스트 코로나"라는 기대감을 갖고 시작했으나 코로나 바이러스의 기세는 수그러들지 않았고, 위드 코로나를 꿈꾸는 이들을 비웃듯 이제 알파를 넘어 새로운 변이종 오미크론이 온 세상을 공포로 몰아넣고 있다. 교회는 여전히 예배를 위해 입장인원을 제한할 수밖에 없고 성도들 역시 예배를 위해 교회 나가는 것을 부담스럽게 생각해야 하는 상황이 되었다. 자칫 자신이 다른 이들에게 혹은 교회에게 코로나 확산의 매개가 될 수 있는 위험을 늘 안고 있기 때문이다. 포스트 코로나를 준비해야 한다며 팬더믹이 끝나기를 기대했던 것과 달리 더 빠른 변이를 양산하면서 더 많은 중증환자와 사망자를 양산하게 된다.

    이런 와중에 바이러스의 확산이 지속되는 교회는 백신 무용론을 주장하는 이들과 백신접종을 주장하는 이들 사이의 벽이 생긴다. 서로의 생각을 존중하는 것이 아니라 왜곡된 정보와 아집 사이에서 극단적 증오를 양산하는 이것은 또 정치적 입장으로 구분되기도 하면서 각기 주장하는 견해를 따라 보이지 않는 벽이 교회와 교회들 사이에 점점 두텁게 쌓이고 있다.

    대선이 가까워지면서 누구를 지지할 것인가에 따라 정치적 입장으로 갈라지는 교회, 바이러스가 기승을 부리면서 백신 필요론과 무용론을 주장하면서 갈라지는 교회는 지금 세상 사람들에게 어떻게 보여질까? 세상사람들이 아닌 교회 내 성도들에게도 교회의 이런 정황들이 당황스럽고 혼란하게 만들기만 할 뿐이다. 성도들도 서로 입장을 달리하다 보니 그 안에서의 다툼과 분열이 발생한다. 정치를 정치적 논리로 접근하는 것이 아닌 신앙적 관점으로 해석하려고 시도하지만, 결국은 그 관점이라는 것도 지역적 논리에 의해 달라지기도 하고 정치 진영논리에서 달라지는 것은 동일하다. 모두가 하나 되어 극복하기에도 버거운 상황들이 뿔뿔이 흩어진 논리와 사고로 갈라지기만 할 뿐이니 이를 어쩔까.

    본래 교회가 이 정도로 세상적 상황과 주장들에 의해 이리 저리 휘둘리고 나뉘어질 정도로 힘없고 무능한 공동체였던가 하는 의구심을 갖게 만드는 상황들이기도 하다. 안타까운 것은 서로의 주장에 근거를 제시하기 위해 전문직인 의사나 혹은 정치가들의 주장을 빌려와 교회에서 근거로 차용하고 있으며 교회도 이것을 퍼나르고 있으니 교회가 말하는 주장도 신앙적 근거라 말하기 어렵게 되었다. 그들의 주장을 듣고 있으면 답답함이 더해진다. 정확한 객관적 근거가 아닌 자신이 바라보는 관점에서 의혹을 제기하기 때문이다. 왜 그런 이들의 주장에 이토록 미혹되는 것일까?

     

    어떤 입장이든 그것을 따르면 속게 되어 있다

    정치는 소속정당의 주장을 따라갈 수밖에 없다. 다른 소속당의 생각과 주장에 대해 긍정적으로 접근할 수 없는 것은, 그 뒤에 어떤 본색을 감추고 있는지 따져보아야 하는 것은 물론이고 자신들의 이권과도 계산이 맞아야 한다. 설령 상대당의 의견이 좋은 아이디어일지라도 좋다고 동조해줄 수 없는 것이 표를 잃을 수 있기에 상대당의 주장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일 수 없는 속성을 가질 수밖에 없다. 그런데 교회는 이런 정당들의 몇 가지 표면적 우호 뒤에 서서 그들을 응원하는 것이 곧 신앙적 행동인 것처럼 호도하기도 한다. 교회가 정치적 견해의 그 어떤 편에 서는 것일지라도 객관적 진실의 눈이 아닌 이미 전도된 사고와 시각을 가지고 접근하게 된다. 어느 편이든 그들과 가까이 하는 교회는 그들에게 이용당하게 되어 있다. 그런데 이런 사실을 정말 모르는 것일까?

    문제는 백신조차도 처음부터 등장했던 음모론을 활용한다. 한 번 등장한 음모론은 끝없이 그 증거물이라는 그럴듯한 자료들을 쏟아내게 되고, 그런 것에 한 번 눈이 뒤집히면 다른 의견은 거들떠 보지도 않고 들어도 들리지 않게 된다. 역사적으로 이런 일들은 수도 없이 많고 반복되고 있으나 알고보면 그저 음모론으로 끝나버리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시에는 그 모든 음모들이 눈이 뒤집힐 정도로 사실처럼 보이게 되어 있다. 물론 진실을 지키기 위해 경계의 눈을 부릅뜨고 잘못된 것을 바로잡는 것이야 어쩌면 너무나 당연하고 필요한 일이지만, 제한된 지식이나 판단력으로는 오늘날 너무나 교묘한 정보와 음모가 횡행하여 판단이 쉽지 않다. 그러므로 어떤 정당들의 주장이나 신앙인들의 주장에 덮어놓고 신뢰를 심어주는 것은 너무도 위험하다. 요즘은 각종 유튜버 영상을 활용하여 정보를 전달하는데 이 유튜버의 정보란 객관적 근거를 확인할 수 없는 더욱 신뢰하기 어려운 것들이다. 그렇다면 오늘날의 교회들은 무엇을 신뢰의 근거로 삼을까... 놀랍게도 교단 혹은 가까운 목회자들의 정보에서 신뢰의 근거를 찾는다. 세상에서 가장 객관성을 담보할 수 없는 위험한 정보일 뿐이다. 그러나 목회자들의 자기확신과 미친 전파력은 세계 최고라 할 수 있기도 하다. 그를 따르는 신도들은 그 영향력의 짙은 그늘 아래 있기도 하다. 이래도 괜찮은 것일까?

     

    역사의 교훈에 주목

    역사는반복된다. 인간의 역사는 거의 되돌이표처럼 반복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객관적 시각에 눈을 뜨기 위해서 가져야할 지식 중에 가장 중요한 정보는 역사이며, 두 번째는 과학적 지식이며 세 번째는 신앙적 자세다. 문제는 과학적 지식이라는 것에 함정이 있다. 과학은 견해에 따라 다양한 논리를 제공할 수 있고 다른 결과를 제공할 수 있기도 하다. 과학은 신봉하는 이들이 검토과정을 확인할 길이 없으니 결과에 대한 이야기에 몰입하게 되어 있다. 그런데 이 검토과정을 확인할 길이 없다는 것이 문제가 되는 것은 과학이라는 것이 정확한 도출이 가능하기도 하지만, 반대로 만들고 싶은 방향으로 조작할 수 있는 것도 가능한 것이 과학의 세계라 할 수 있다. 수많은 과학자들이 존재하지만 바이러스와 백신에 대한 서로 다른 의견을 제시하게 되는 것은 이들이 어떤 방식으로 수치에 진입했는가 하는 것과 그들이 처한 진영의 편에 서서 주장하기 때문이다. 여기에 함정이 있으나 일반인들이 그 진위와 의도를 알아낼 방법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과학적 지식은 반드시 필요하다. 역사적 경험과 과학적 지식을 적절히 응용될 때 판단의 실수를 최소화 할 수 있다. 특히 진영의 논리는 더욱 곤란하다. 교회는 그 밖에 서서 지켜볼 수 있어야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

    역사의 기록은 우리 자신을 돌아보게 한다. 그러나 성경은 단순한 역사의 기록만을 남기지 않는다. 성경의 역사는 기획된 역사이며 의도된 역사라는 사실을 간과하지 말아야 한다. 하나님의 의지와 계획을 따라 진행되는 역사를 기록한 책이다. 우리의 역사가 아니라 하나님의 관점으로 기록된 역사라고 할 수 있다. 신학이란 바로 그 하나님의 역사를 볼 수 있는 눈을 갖게 하지만 학문으로서의 역사적 접근과는 확연한 차이를 갖는다. 역사적 관점만을 말한다면 성경의 역사적 관점보다 학문으로서의 역사적 관점이 도리어 더욱 객관적 사실을 볼 수 있게 하기에 세상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판단하고 정의하는데는 학문적 접근이 도리어 더욱 신뢰할 수 있다.

    성경에서 말하는 전염병은 저주로서의 전염병이 대부분이다. 하나님의 기획이고 의도이며 깨우침을 위한 수단이 되기도 한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가 만나는 전염병을 그렇게 해석한다면 심각한 문제 앞에 서게 된다. 교회 스스로 이 문제를 해결할 능력을 갖지 못하기 때문이다. 어쩌면 그런 관점에서 본다면 전염병은 세상 때문이 아니라 신앙인들 때문에 발생한 것일 수도 있게 된다. 하나님의 기획된 역사가 있다고 해서 하나님께서 세상의 역사를 부정하거나 배제하시는 것은 아니다. 도리어 그 세상의 역사속에서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들이 더욱 빛으로 나타나기를 원하시기 때문이다. 성경의 역사로 오늘날의 팬더믹을 설명하기 어려운 이유다.

     

    전염병이 돌 때 교회들이 보여준

    세상이 전염병으로 고통할 때 교회는 그들을 품고 보호하는 일에 주력하기 보다 그 책임을 누군가에게 전가하려 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교회는 스스로의 문제를 끌어안고 회개하고 돌이키는 것이 아니라 세상의 죄와 허물이 문제의 원인인 것처럼 주장해왔다. 전염병의 특성상 모임은 독이다. 사회란 모임을 이루지 않고는 돌아가지 않는 곳이 사회다. 교회를 비롯한 종교기관들은 모임이 곧 생명이나 마찬가지이다. 하나님의 의도였다면 하나님께서 왜 모임을 중단하는 극약처방을 하셨을까?

    코로나 팬더믹의 직격탄을 맞은 곳은 바로 자영업자와 종교기관이고 자영업자들은 홀로 싸움을 전개해야 하는 한 편 교회는 집단으로 싸워야 하는 상황이다. 비대면 강화의 포화속에 놓인 자영업자들과 교회는 크게 반발할 수 밖에 없었으나 정부의 시책을 따를 수밖에 없는 것이 현실이다. 그러다 교회가 반발하기 시작했다. 이유는 간단했다. 술집은 저렇게 오밀조밀 모여서 마음껏 즐기고 대중교통은 빽빽하게 이동하는데 왜 방역을 철저히 수행하는 교회는 모임을 그토록 제한하느냐는 것이다. 이런 항의가 형평성에서의 문제라 할 수 있을까? 자영업자 입장에서 보았다면 교회가 한없이 섭섭하고 불편하였을 것이다. 그러면서 수많은 교회들의 관심을 갖기 시작한 것이 백신 무용론이다. 백신을 맞아도 소용없는 것을 왜 맞게 하는지 심지어 백신으로 사망한 사람이 더 많다는 괴담에 가까운 주장을 퍼옮기기 바쁘다.

    아픈 이야기이기는 하지만 교회는 자신의 생존을 위해 정부와 싸워야 할 것이 아니라 세상을 보호하기 위해 싸워야 했다. 그들의 아픔을 공감해야 했고, 그들의 슬픔을 위로해야 했다. 모세가 자기백성들을 보호하기 위해 하나님 앞에서 고백했던 것처럼 교회는 이 백성들을 위해 하나님 앞에 우리 자신을 희생물로 내놓아야 하지 않았을까? 이 고통의 강은 쉽게 멈출 것 같지 않다. 누가 옳은가 그른가의 논쟁으로 시간을 보내기 보다 우리가 취해야 할 지혜로운 행동이 무엇인지 분별해야 할 때가 아닐까.. 그 지혜는 세상이 아닌 하나님께로부터 나온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아래 링크는 현재 무너지고 있는 교회의 단면을 보여준다.

    무종교인 증가, 개신교인 추락.. clic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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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나눔] TS를 알자

    • gtbc (gtbckim)
    • 2021-12-23
    • hit1381

    TS를 알자

      우리의 성경연구 첫 단계는 물론 성경을 기록한 원어의 구문syntax이다. 구문은 문장을 배열하는 문법의 법칙이다. 그러나 구문이 문장을 연결하는 것까지는 해결해 줄 수 있지만 각 권의 전체를 꿰뚫는 문맥을 보게 하는 것은 쉽지 않다. 불가능하다는 의미는 아니다. 구문으로 문맥을 파악하기 위해 가장 좋은 방법은 전체를 한 장처럼 볼 수 있게 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어지간한 훈련이 없고서는 여간 어려운 것이 아니다.

      TS는 전체적인 문맥과 단락의 연결과정을 볼 수 있도록 돕는다. 저자의 생각을 읽어내는데 탁월한 효과를 가진다. 문맥에 대한 기본적 이해가 없는 이들은 TS자료를 보면 "개요 아닌가요?"하고 묻는다. 개요는 단락 혹은 부분의 내용을 정리할 때 하는 방식이지만, TS는 단락을 뛰어 넘어 단락과 단락의 관계를 짚어 책 전체의 문맥을 보게 한다. 구문이 부분적인 설명에 탁월한 능력을 갖는다면 TS는 책 전체의 내용을 한 눈에 보도록 돕는 역할을 한다. 둘 다 소홀히 할 수 없는 이유다.

      TS는 한 장 a chapter 안에서 단락의 범주와 단락간의 관계를 파악하며 설명하게 한다. TS는 구문에서 문법적으로 넘지 않아야 할 선을 넘어 배열되기도 한다. 구문만 보면 이것이 왜 여기에 들어가 있는지 궁금해지는 부분이기도 하다.

      TS는 만들고 구성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이를 볼 수 있는 눈을 갖는 것이 더 중요하다. 구성의 원리가 따로 문법처럼 법칙으로 정해진 바 있는 것은 아니지만, 객관적 접근 방식을 통해 문맥의 흐름을 볼 수 있게 배열하고 주제를 정해주므로 그런 관점을 이해하는 이들에겐 탁월한 연구재료가 될 것이다.

      TS는 저자의 호흡과 생각까지 읽게 한다. 로마서 책자가 나온 뒤 많은 분들로부터 질문도 받고 많은 분들로부터 호평을 얻기도 한다. TS는 보는 눈이 있는가 없는가에 따라 달라질 것이기에.. ^^

      두 번째 TS 책자가 발간 준비를 앞두고 있다. 더 많은 책자들의 TS가 준비되어 있으나 아직은 소비자들의 반응에 더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 덮어놓고 발간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TS의 의도를 정확히 이해하는 이들이 얼마나 있는가를 살펴야 하는 상황이다.

      한 권의 책이 어떻게 구성되고 무엇을 말하고 싶은 것인지를 한 눈에 보도록 돕는 TS 성도들의 뛰어난 성경교사가 될 수 있기를 기대하고 있다.

      TS의 기본은 구문이지만 구문으로 보여줄 수 없는 부분을 볼 수 있게 감당하는 것이 TS라 할 수 있다. GTBC는 보다 더 뛰어난 연구자들이 나올 수 있기를 기대한다.

     

      더 많은 이들의 학습을 위해 온라인 강좌가 진행중임...

      필요한 이들은 다음 연락처로 문의바람 010 4203 91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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