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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인은 달라야 하나?
달라야 한다면 어떻게 달라야 할까? 영적으로 육적으로 세속적이지 않은 무언가 티가 날만큼 달라야 하는 걸까? 그렇다면 그 다름은 어떻게 표현되는 것이 맞을까? 그리고 실제 우리는 얼마나 다르게 살고 있을까?
요즘은 교회의 위기론을 벗어나 폭망의 길을 걷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을 갖게 할만큼 세상으로부터 멀어져 가는 교회임을 느낀다. 교회가 언제는 세상과 가까웠을까? 한동안 교회는 끝없는 부흥의 길을 걷는 것처럼 보였다. 성도 1천만 명을 자랑할 때, 실제 그랬는지는 몰라도 대단한 위력을 떨치던 때가 있었던 것은 사실이고, 이대로 간다면 교회가 한국의 국교라는 인정을 받을 수 있을 것 같은 착각에 빠졌던 때도 있었다. 그런데 어느날부터 한국교회의 위기설이 솔솔 돌기 시작하더니 급기야 급격하게 교세가 줄기 시작하면서 기독교인 청소년들의 숫자가 좋게 말해서 3%를 맴돈다는 말이 나오기 시작했다. 최근엔 그 마저도 지나치게 높은 수치라고 언급하기도 한다. 어쩌다 교회는 이 지경이 되었을까? 한바탕 부흥의 기로에 있을 때, 기독교인의 모습은 어땠었고, 오늘날 폭망 수준으로 떨어진 교회의 성도들은 어떻게 변했기에?? 이 모양이 되고 있을까?
당시의 성도들은 꽤 신령했는데, 요즘 성도들은 너무나 세속화 되어서였을까? 그러나 성도들의 변화에서 그 원인을 찾는 것은 무리일 듯하다. 사람들에게 교회를 대표하는 이들은 성도들이 아니라 목회자들이기 때문이다. 성도들을 비난하는 비중보다 목회자와 교회 자체에 비난을 퍼붓는 것이 사실이기도 하다. 그리스도인이 달라지면 교회가 부흥될 수 있을까? 기도가 부족해서? 열정이 부족해서? 순수성이 떨어지고 성령에 충만하지 못해서? 이런 것에서 원인을 찾으려 한다면 방향을 잘못 잡은 것이 분명하다. 수십 년간 똑같은 이야기만 하고 있는 것이니 말이다. 교회를 이렇게 만든 것은 성도들이 아니라 사역자들이라는 사실을 부정한다면 눈가리고 아웅하는 격이고, 책임을 쫄병들에게 돌리는 장교와 다를 바 없다.
달라져야 할 것은 성도들이 아니라 그들을 이끌고 가르치는 사역자들이다. 그들의 수준이 만들어낸 것이 오늘 우리 교회들인 것이고, 성도들의 수준이 된 것이다. 이젠 교회가 세상 사람들의 시민의식, 혹은 사회의식 조차 따라가지 못한다는 생각을 갖게 한다. 왜 똑똑한 사람들을 바보로 만들어 갈까? 왜 본인들은 바뀌지 못하면서 성도들이 바뀌길 원할까? 정작 달라져야 할 것은 성도들이 아니라 그들을 이끄는 지도자들이다. 이미 정치색에 깊이 물들어 있는 그들이 쏟아내는 언어들이 문제고, 세상을 바라보는 가치관의 심각한 괴리감이 문제라 할 수 있다. 자신은 이미 특별한 존재이고, 세상은 타락한 짐승들처럼 여기는 바리새인같은 사고를 가진 그들의 인식을 바꾸지 못한다면, 교회는 더 깊은 나락으로 떨어져 갈 것이 분명하다.
심히 안타까운 것은 그들 자신의 문제가 무엇인지 생각지조차 못하는 어리석음이다.
누가 가장 가까운 사람일까?
교회에서 자신과 가깝거나 친근한 사람을 찾아보면 꽤 여러 이름을 말할 수 있는 사람도 있고, 두세 명 손에 꼽기를 망설이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과연 누가 가까운 사람일까?" "어떤 사람을 나와 가까운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좋은 사람이 가득한 신앙공동체지만, 그 안에서도 자기의 내밀한 이야기를 솔직하게 고백할 수 있는 사람을 찾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적당한 거리에서 친근함을 느끼는 것'과 '내밀한 사정을 알고 나눌 수 있는 가까운 사람'은 분명히 다르다. 후자와 같은 이런 사람은 신앙공동체가 아닌 사회생활에서도 쉽게 만나기 어렵다. 어쩌면 그래서 신앙인들은 하늘을 바라보는지도 모른다. 함께 허심탄회하게 자신의 상황을 나눌 수 있는 대상이 있다면, 기도의 시간이 줄어들어서 하나님께서 그런 사람을 곁에 두지 못하게 하시는 것일까? 그럴리가 없지만, 하늘의 하나님께 하소연이라도 하지 않으면 견딜 수 없을 것 같은 마음을 가진 사람이 교회 안에서도 많을 것이다. 그나마 감사한 것은 하늘의 통로는 열려 있다고 믿는 것이 다행이고 축복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열린 창으로 열불나게 기도하고 난 뒤, 때론 응답을 받는 것 같기도 하고, 때론 도무지 하나님께서 듣지 못하시는 것 같은 상황도 만나게 될 것이다. 그럴 때는 자신의 '믿음의 부족'이나 '부실한 기도가 문제'라고 한탄하기도 하면서 스스로를 탓하기도 할 것이다. 누군가에게 자신의 부끄러움을 드러내고 싶지는 않은데, 하나님께 기도하면서 기다리자니 답답한 마음은 점점 더 커질 듯하고.. 이럴 때 함께 고민을 나누고 문제의 해결에 도움을 줄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이런 고민에 빠진 이들이 목회자를 찾아가기는 할까? 찾아가면 도움을 얻을 수는 있을까?
교회마다 목회자에게 비밀로 하는 중보기도 사역자들이 존재하는 경우가 많다(실제로 많이 본 경험이다 ㅎ). 차라리 그런 이들은 대부분 마음을 터놓고 말하게 되는 것으로 알고 있다. (중보기도도 매우 직접적이고, 실질적으로 해주기 때문일지도..ㅎ) 예전 신학교에 다닐 때, 이런 사람들의 기도를 듣고 신학교에 온 이들이 제법 많았던 기억이다.
예배 후 로비에 서서 목회자에게 기도 받는 사람들을 종종 본다. 대부분 환자들이고, 상당수는 중환자 들이다. 환자들은 기도를 받는 것에서 매우 긍정적인 위로 혹은 신호를 느끼게 된다. 그러나 재정적인 어려움이나 관계의 어려움은 대놓고 기도해달라 말하기도 어려울 것이다. 스스로 해결할 문제라 여기는 것이 사실이다. 스스로 해결할 수 있었으면 고민도 하지 않았을 것이다. 할 수 없이 매달리며 구하는 것이 이 상황을 타파할 수 있는 지혜를 주시기를 원하는 것이다. 신앙공동체 안에서 가까운 사람은 참 많은데, 심리적 내밀함을 나눌 수 있을만큼 가까움을 얻기는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것이 사실이다. 그렇다면 가까운 사람은 없다고 보는 것이 맞는 것일까?
바울에게 가까운 사람 중
바울은 자신의 간절한 소망이 로마로 떠나는 것이었지만, 그 보다 먼저 할 일이 예루살렘을 방문하는 것이었고, 그 방문을 위해 마케도니아의 성도들의 연보가 절실히 필요했다. 또 서바나로 떠나기 전 로마교회의 도움을 얻기를 기대하는 것도 있었다. 바울 역시 사역을 위해 금전적 도움을 요청할 수는 있어도 개인적인 도움을 요청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바울은 텐트제작tentmaker을 하는 사람이었고, 함께 도움을 제공한 부부인 브리스길라와 아굴라는 바울로부터 신앙적 도움을 얻는다. 사실 성도들도 서로에게 이런 도움을 줄 수 있는 방법이 있다. 신실한 자세로 서로를 아끼고 존중하는 자세로 서로를 섬길 수 있는 기회가 제공될 수 있는 것이 좋다. 사실 앞에서 언급한 가까움은 이런 교류속에서 더 깊어지는 경향이 있다. 신앙적 행위만이 아니라 생업을 나누고 함께 하는 행위는 금지되어야 할 사항이 아니라는 말이다. 도리어 이런 사적인 교류속에서 신앙적 깊이는 더욱 깊어질 수 있다. 때로 문제가 발생하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그 문제가 무서워서 피하는 것이 더 큰 문제일 수 있다. 적절한 범주 안에서 협력할 수 있는 방안을 모색하는 아이디어가 필요하다.
작은 교회 목회자가 더 큰 교회 성도의 기업에서 직원으로 일하는 것도 나쁘지 않고, 협력하는 것도 좋다. 서로가 불편한 것은 지위에 대한 불필요한 선입견 때문이다. 개척교회의 사역자들을 타교회 성도의 기업에서 일하게 하는 것은 교회를 돕는 좋은 방법이 될 수 있다고 믿는다. 이런 것이 실질적인 도움이 될 수 있고, 신앙적 교감을 나누는 것에도 더 유익할 수 있다. 시드니의 한 목회자로부터 들은 이야기가 있다. 그곳에서는 목회자도 job을 갖는 것이 당연한 일이지만, 한국에서 방문한 목회자들은 job을 가진 목회자에게 믿음이 없다고 여긴다는 것이다. 목회는 거룩한 사역이고, 목회와 상관없는 job은 세상적이라 생각하는 것이다. 이런 사역자들이 존재하는 한 성도들은 피곤하다. 이미 대형화 된 교회의 목회자는 목회 외에 매우 많은 역할을 수행한다. 물론 그 모든 일이 목회사역의 연장선이라 여길 것이다. 그렇다면 힘없는 다른 목회자에게 그 일을 나누어 주면 안될까? ^^ 더 잘 해낼 수도 있을텐데..
제목이 "잘 알기에 말하기 어렵다"고 한 것은,
이것이 심각한 문제임을 잘 알기에 공개적으로 드러내놓고 말하기가 어렵다. ^^
목회자들이 성도들 사이의 친근감을 가로막는 역할을 많이 하고 있다. 그것은 곧 신앙적 교감이 커지고 성숙해지는 일도 막는 역할이 된다. 하나님도 교회를 통해 막막한 어려움을 겪는 그 성도들의 모든 필요가 채워질 수 있기를 기대하신다. 또 교회는 그런 곳이기도 하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요,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케 하시는 분의 충만함입니다." 엡 1:23
그 전에 교회 안에 충만함이 가득한 것이 마땅하기도 합니다. 물론 그 충만은 하나님의 뜻과 의지를 말하면서 또한 성도들의 모든 필요도 공급되는 것이 마땅합니다. 오늘도 참 좋은 오후입니다. 감사합니다.
GTBC 성경교육원장 김강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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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자신의 성경지식에 대한 이런 혼란스런 생각을 가진 이들에게 이렇게 묻곤 했다. 누군가 우리와 다른 집단에 속한 사람들이 성경에 대해 논의하자는 제안을 했을 때, 선뜻 오케이 할 수 있는가? 그렇다면 조금 아는 사람일 수도 있으나, 잔뜩 긴장이 되고 꺼려진다면 십중 팔구 성경을 모르는 사람임이 틀림없다. 아는 것 같으나 모르는 이들이 더 많다는 말이다.
신학이 무엇인지, 성경이 무엇인지 구분이 되지 않거나, 66권 성경 중 한 권이라도 내 입으로 설명할 수 없다면 그냥 모르는 사람으로 생각하는 것이 편하다. 그래서 몇 년 다닌 경력이나 직분을 자랑하기 전에 성경을 배워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우리의 자세여야 하고, 이것이 교회가 느끼고 가져야 할 사명이기도 하다.
늘 말하지만, 그냥 한 권만 집중적으로 파 보자. 그리고 그 한 권을 자유롭게 이해하고 말할 수 있을 때까지 공부하자. 이것이 가장 좋은 학습의 발판이 될 수 있기에 그렇다. 구문이 어떻고, 문맥이 어떻고, 신학적 주제가 어떤가를 말하기 전에 일단 각 성경 각 책의 저자가 말하고 싶은 것이 무엇인지를 느낄 수 있다면 학습에 자신감과 함께 도전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일단 눈 딱감고 한 권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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