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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지 | 내 입으로 말할 수 없는 성경? | 2024-10-29 | hit46146 | |
| 공지 | 성경학습의 기회가 열린다 | 2022-08-25 | hit51304 | |
| 공지 | 서울 삼실 전경과 위치입니다. | 2021-06-13 | hit55579 | |
| 공지 | 목회자 구문강의 알림 | 2020-11-17 | hit54507 |
사무실 이전을 마치고
갑작스럽게 사무실을 이전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있었습니다. 주차 및 몇 가지 요인이 우리가 주로 하는 교육 모임을 가질 여건에 부합하지 않았고, 변화된 정치적, 경제적 환경은 서울의 중심부에 있으면서도 더욱 접근성을 어렵게 하는 요소가 되었습니다. 사무실 이전을 결정할 수밖에 없다는 생각을 가졌으나 최근 경기도 워낙 좋지 않아 사무실 임대계약이 서너 달 이상 걸릴 것으로 예상하고 내놓았는데 갑작스럽게 입주를 원하는 분이 나서는 까닭에 이전을 조금 서두를 수밖에 없었습니다. 다른 곳 사무실을 확보해 둔 상태가 아니어서 일단 부천에 사무실을 두신 집사님의 사무실로 짐을 철거하기로 했습니다. 날이 춥고 경기도 얼어붙은 상태여서 사무실을 찾으려면 그렇게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을 것 같기는 했지만, 잠시 숨돌릴 필요도 느끼고 있습니다.
사무실 이전을 위해 몇 가지 방안을 준비한 것은 사실이지만, 예상치 못한 재정적 요인이 충돌을 일으키고 잠시 주춤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일은 하나님께서 하신다고 우리는 늘 그렇게 말하지만, 우리 자신이 마땅히 행할 일도 있음을 부정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아무 계획도 없이 움직일 수는 없습니다. 두 가지의 사람이 있습니다. 어떤 목표나 의지가 있을 때 움직이는 사람과 상황을 만들기 위해 움직이는 사람입니다. 성경은 목표의식을 부여하죠. 노아에게는 방주라는 것이 있고, 아브람에게는 가나안이라는 목표가 있었습니다. 저는.. 음.. ㅎ
교회 성경학습
최근 소속교회에서 담임 목사님께서 앞으로 오후예배를 매주 한 권씩 다루기로 하셔서 반가운 마음으로 환영하는 마음으로 참석했습니다. 첫 번째 주에는 경남의 한 목사님을 초청하셔서 성경 전체의 구성과 내용을 두 시간 동안 알게 해주신다고 해서 들었고, 흥미롭게 들었습니다. 두 시간 동안 성경 전체를 말하겠다고 하는 것 자체가 말이 되지 않는다는 것은 알지만, 그 구성을 이해시키는 모션동작이 재미있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쉽게 접근하기 위해 얼마나 많은 고민을 했을까 하는 생각도 했고, 그런 수고에 존경스럽다는 생각도 했습니다. 아무튼 성도가 성경을 알아야 하는 것은 정말 중요한 일이기는 합니다.
그 강좌의 후속타로 이제 매 주 성경을 한 권씩 끊어 가시겠다는 것이니 흥미로운 마음으로 그 시간을 기대할 수 있었죠. 아무래도 오랜세월 강의로 살아왔던 제게 목회자의 이런 도전은 박수를 칠만한 결정이라 생각했습니다. 성경을 강의할 때는 중심사상을 바탕으로 전체를 이해시키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뜻밖에도 단지 구성요소와 개요 정도의 수준에서 그것을 한 시간 안에 모두 다루려니 시간이 촉박하고 성도들은 머리에 남는 것이 거의 없다고 보는 것이 맞을 것입니다. 공부를 마치고 몇 분께 이번 공부는 좀 어땠는지 반응을 보려했더니 쓴 웃음을 지어보입니다. ㅎ
만일 이런식으로 66권을 해야한다면 그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하는 것이죠. 엄밀히 신학도 아니고 성경도 아닌 이런 공부를 해야할 이유를 성도가 찾아야 하는 상황이 온 것입니다. 성경은 설교와 달라서 66권 전체의 그 구성과 원리 뿐만 아니라 각 권 속에 흐르는 중심사상은 전체를 관통하게 하는 요소가 됩니다. 그 중심사상을 다루는 몇 가지가 있기는 하지만, 이번 우리 교회의 성경학습은 미래의 결과가 뻔히 보이는 것일 뿐입니다. 모아놓으면 자료가 될 것이라 말하지만, 시중에 어떤 자료를 갖다주어도 그것보다 좋은 자료가 될 것이라는 생각이죠.
성경을 가르치는 것은 신학을 공부한 사람이라면 누구나 할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스스로 철저히 준비된 자가 아니면 함부로 꺼내들 수 없는 책이 성경이기도 합니다. 살짝 아쉬운 정도가 아니라 매우 아쉽고 모인 분들의 열정을 소진하는 시간이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오늘 온라인 강좌에서 우리 교육생들에게는 제가 한 번 창세기 알려드리겠습니다. ^^
첫 수업의 기억
수강생들에게 첫 수업은 늘 지금까지의 익숙했던 것들로부터의 생소함을 덜어주어야 할 책임감을 느끼게 한다. 지금까지 설교에 익숙했고 은혜로운 감정이입이라는 어떤 대화들에 익숙해져 있던 이들에게 성경의 문법적 구성원리라거나 문맥적 이해와 사고의 폭을 넓혀야 한다는 것은 생소함을 넘어 불편함으로 다가올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설교가 들을 때마다 은혜롭고 기대감을 갖게 할 수 있으나 오랜 기억으로 저장되기보다 즉흥적 감동에 머물 경우가 대부분이라면(설교자 역시 이 감동이라는 부분에서 받는 스트레스가 적지 않다), 성경공부는 처음 익숙해지기가 어렵게 느껴질 뿐 한 번 배운 학습은 하나의 공식이 되기도 하고, 길잡이가 되어 스스로 성경을 읽고 보는 재미와 감동을 더하게 된다. 지금까지 여러 학습대상을 만나면서 목회자와 성도에게서 큰 차이를 느끼기 어렵다는 생각을 갖게 된 것은 둘 다 이런 방식으로 성경을 학습해 본 일이 없기 때문일 것이다.
설교와 성경학습의 차이
한 마디로 설교가 건물 내부의 디테일을 하나 하나 관람하며 설명을 듣는 것에 감동하는 것이라면, 성경학습은 건물 자체의 설계도를 보고 이해하는 것과 비교할 수 있다. 건물의 모양과 속성과 용도가 무엇인지 파악하고 그 내부를 세밀히 들여다 보는 것은 보다 분명한 깨달음으로 남게 된다. 동일한 본문일지라도 들을 때마다 내용이 달라지는 설교와 달리 성경학습은 튼튼히 세워진 기초골조부터 시작해서 내부의 구성과 디자인을 확인하는 것이므로 볼 때마다 달라지는 것이 아니라 볼 때마다 그 깊이와 넓이가 주는 감동이 늘 새롭게 다가오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자신이 그 말씀과 감동 속에서 무엇을 어떻게 할 것인지 알고 누리는 것이다.
첫 수업에서 이런 언급을 하면 대부분 그 말의 뜻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데 그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라는 생각이다. 첫 만남에 잔뜩 기대한 얼굴들에 찬물을 끼얹지 않기 위해 이런 저런 도입을 준비한다. 지금까지 알던 것들을 깨기 위한 시간이 아니라 알고 있던 것들에 더 분명한 힘을 얻도록 돕는 것이다. 자연스럽게 하나님의 말씀이 주는 깊이를 느끼며 공감하는 시간을 갖도록 하는 것이다.
고정관념의 틀
한 번은 목회자 세미나 시간에 짧은 강의시간을 고려하여 책의 내용 전체 구성과 그 이해의 방식을알려드렸더니 한 분의 목사님은 매우 충격적인 반응을 보였다. "아이구~ 저는 우리 성도들에게 이렇게 설교할 수 없어요. 지금까지 내가 배우고 가르쳤던 것들과 너무 달라서 당황스럽습니다."라고 하셨다. 그렇다. 서서히 본문을 보는 방식에 익숙해지는 것이 아니라 급작스럽게 핵심포인트에 접근하면서 부대끼는 마음의 갈등이 적지 않았던 것이다. 성도들이 사이비를 만났을 때 그들이 전하는 생소한 것으로 그 목사님과 같은 반응을 보일 수 있다면 좋겠으나 성도들은 사이비들이 전해주는 말에서 반대의 의미로 충격을 받는다. "왜 우리는 지금까지 이런 것을 배우지 못했지? 도대체 우리는 무얼 배운 것이지?"라는 것이다. 결국 자신의 믿음이 가짜이고 사이비가 진짜라 확신하게 되는 것이다. 도대체 무얼 어떻게 가르쳤기에 이런 반응들을 보이는 것일까..
한 권의 학습을 마치면
어렵게 한 권의 책을 학습하거나 마치면 다양한 반응을 볼 수 있다. 이렇게 좋은 것을 왜 지금까지 교회는 가르치지 않았을까요? 혹은 이렇게 좋은 것을 왜 신학교에서 배우지 못했을까요?라는 것이다. 왜?라는 질문은 적합하지 않을 수 있다. 가르치는 사람이 있어야 배울 수 있는 것이고 가르치는 사람이 없으면 배울 수 없는 것이다.
일단 교회에는 목회자 외에 성경을 가르칠 사람이 없다. 목회자가 배우지 못했다면 교회에서 성경을 제대로 배우기 어렵다. 어차피 신학교에서조차 배우지 못한 것이니 가르쳐 달라고 요구해도 응답해 줄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단지 우리는 그저 은혜로운 말씀이라는 것에 사로잡혀 오늘 내 감정에 위로가 되고 자극이 될 수 있는 것을 찾게 된다. 가수들이 한 곡 노래로 감동을 주는 것처럼 설교가 또한 그래야 한다는 것이다. 그나마 노래는 돌아서서 배우고 흥얼거리기라도 할 수 있을지 모르나 설교는 다시 듣게 될 때 처음의 감동으로 다가가기도 쉽지 않다. 그런 설교에 익숙한 현대의 성도들은 성경학습은 지루하고 재미없는 것으로 간주하여 피할 방도가 곧 '공부할 시간이 없다'는 것이다. 봉사의 시간은 있고 예배에 참석할 시간은 있어도 성경을 학습할 시간은 없다? 그럼 우리의 믿음에 대한 확신은 도대체 어디로부터 얻게 된 것일까? 물론 설교라고 할 것이다.
믿음의 성장이 없는 다람쥐 쳇바퀴 돌 듯 주일예배를 드리고 봉사하다가 돌아가서 또 다음 주 예배와 봉사.. 이렇게 일 년, 십 년, 오십 년을 신앙생활 해도 성경 한 권 제대로 아는 것이 없다면 그의 믿음의 근거는 도대체 어디서 찾을 것인가? 오늘도 안타까운 마음에 한숨 지으며 더 쉽고 나은 방법을 찾는다. 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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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탄으로 상처입은 사람들
왕으로 오신 아기 예수의 탄생은 동방에서 찾아 온 박사들을 통해 헤롯의 귀에 들어가기도 했고, 들에서 양치는 목자들에게도 하늘의 천사들을 통해 알려졌다. 이 기쁜 날 아주 먼 곳에서 찾아 온 동방박사들이 아기예수를 찾아 귀한 예물을 드려 경배하였고, 그날 밤 그들이 꿈에 듣고 본대로 헤롯을 만나지 않은 채 본국으로 떠난 뒤, 유대땅은 평화가 아닌 그야말로 피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이 복되고 아름다운 아기 예수의 탄생이 어떤 이들에게는 저주의 소식이 된 것이다. 당시 아무도 그들을 위로해주지 못했고 아무도 그들의 편에 서서 마음의 상처를 씻어줄 수 없었다. 시퍼런 칼날이 온 유대와 예루살렘을 휘젓는 동안..
오늘날 아주 작은 교회들 중 어떤 교회들은 성탄전야의 축하행사를 갖지 못한 채 보내야 했다. 그런 행사가 성경적으로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는 것은 아닐지 모르지만, 그런 행사를 갖지 못하는 목회자 혹은 성도들을 의기소침해지게 하는 요소가 되는 것은 사실이다. 반면에 제법 규모가 있는 교회들은 온갖 화려한 시설과 성대한 잔치로 이 성탄의 밤을 휘황찬란하게 만들었다. 참가자들을 위해 온갖 좋은 것들을 동원하였고 이런 저런 선한 영향력을 나타내기도 한다. 무엇이 옳은가 그른가 따지려는 것은 아니지만, 영향력 범주에서 큰 것이 아름답다고 말해도 또 신앙적 관점에서 그날 조금 생색내는 것만으로 칭송 받는 것은 온당치 않다고 말해도 틀렸다 말하기도 어렵다. 모두의 입장이 있고 모두의 환경과 상황을 부정할 수도 없다.
그리스도의 탄생으로 억울한 죽음에 이르게 된 아기들과 가족들이 입은 상처에 대해 당시로서는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고 치부할 수도 있다. 하나님의 거룩한 일이 수행되는 곳에서도 권력을 가진 한 사람의 어리석은 판단과 결정이 얼마나 많은 아픔과 상처를 남기는가 하는 것을 보고도 교훈을 얻지 못한다면 어리석은 백성이 아닐 수 없다.
그리스도의 오심은 화려하고 거대한 교회건물을 짓기 위함이 아니었다. 거대한 교단의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조직을 만들기 위함도 아니었다. 헤롯이 지은 예루살렘 성전을 향해서도 예수께서 "이것을 무너뜨리면 삼일 만에 다시 세우겠다"고 말씀하시는데, 예루살렘 성전의 필요를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었다고 이어지는 말씀이 가르쳐 준다. 다시 지어야 하는 것은 예루살렘 성전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머리가 되시는 교회였다.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워질 하나님의 성전은 곧 거룩한 백성의 회합인 교회였으며, 예수 그리스도의 승천 후 교회는 놀랍도록 왕성하게 세워져 갔던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며 그 교회는 다시 성전이라는 명분의 거대하고 화려한 건축물에 관심을 집중하고 있다.
그리스도께서 세우시는 교회는 성탄을 축하하기 위해 온갖 정성을 쏟을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관심인 세상속 소외된 백성들을 향해 그리스도 복음의 빛을 나타내야 하는 것이다. 복음이라는 이름의 행사가 아니라 복음의 빛이 성도들과 세상 사람들 속에 심어져 빛을 발해야 하는 것이다. 그 빛은 이념이나 사상의 빛이 아니라 순전한 새계명이라 불리는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는 복음의 빛이어야 하고 하나님의 빛이어야 하는 것이다.
여전히 우리는 해마다 성탄절이면 각종 모임과 행사를 통해 그리스도의 오심을 축하하고 즐거워하지만, 과연 이 땅에 생명을 주려 오신 주께서도 그날에 그 축제에 함께 하실 것인지는 누구도 확신하기 어려울 것이다. 오죽하면 이젠 공중이 모여 드리는 예배의 찬양을 통해서도 이 자리에 오셔서 임재해 달라고 요구하겠는가.. 이 땅위에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난 이들로 인해 또 다시 수많은 사람들이 상처입고 고통을 겪어도 어쩌면 주의 이름을 부르는 그들의 눈에는 한갖 보잘 것없는 존재들일지도 모른다. 그들은 상상속 그리스도의 세계를 꿈꾸고 있을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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