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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로의 눈치를 보는 교회
교회는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성도들의 모임이다. 레위인 제사장과 백성으로 구분되는 이스라엘 백성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교회는 여전히 레위인 역할을 하는 제사장과 그들에게 의존하는 백성이 존재한다. 성도는 목회자의 눈치를 살펴야 하고 목회자는 성도의 눈치를 살피는 관계가 되었다. 모두가 바라보아야 할 대상은 하나님이고 그의 말씀이지만 말씀에 대한 분별력을 상실한 교회는 서로의 눈치를 통해 적당히 타협해 가는 공동체가 된 것이다. 오늘날에는 정치적 관심으로 말미암은 눈치까지 더해졌다. 옳고 그름에 대한 판단을 유보하고 각자의 생각에 맡긴다는 것이다.
교회는 성경을 가르치기를 포기한지 오래다. 적당히 예배 드리고 특별한 이슈없이 교제하면 아름다운 공동체라 여긴다. 적당히 샤머니즘적 요소도 용납하고 성공신학적 요소도 슬쩍 남겨둔다. 교회는 이미 하나님의 눈치를 보지 않고 서로의 관심에 적당히 용납해주며 흘러간다. 천 만 성도가 이제 절반으로 뚝 떨어져 나갔어도 정신차리지 못하는 교회는 미래가 없다. 하나님의 의에 대한 가치가 세상적 의와 결합하여 희석된 교회에 어떤 미래를 기대할 수 있을까? 사이비가 득세해도 반응하지 않는다. 시간이 지나면서 교회는 마치 상조기업이 된 것 같은 느낌을 준다. 하나님의 말씀이 살아있지 못한 교회가 미래를 말할 수 없다.
누군가 올린 이 사진에 딱히 반박하기도 어려운 시대를 산다.
정치일까 신앙일까
교회가 발벗고 나서야 할 일이 있고 그렇지 않은 일이 있다. 옳지 않은 일에 나서서 목소리를 내야하는 것은 도덕적으로 정의로운 일이지만, 신앙적인가의 문제는 신중히 검토하지 않을 수 없다. 특히 교회가 정치적 입장을 표명하는 것은 매우 조심스러운 영역이다.
최근의 대통령의 불법적 계엄령 선포와 이로 말미암은 탄핵의 여파가 교계에도 치명적 상처를 입힌 것이 사실이다. 개인적 견해가 아니라 공동체로서 집단의 입장에서 견해를 드러내는 것은 정치적 파급효과가 크기에 교회라는 이름으로 참여하는 것은 매우 신중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런데 놀랍게도 교회가 불법의 위치에서 목소리를 내고 있다는 것이다. 불법이 아니라고 한다. 사회적 법규가 정하는 불법이 분명할지라도 교회가 불법이 아니라고 말하면 불법이 아닌 것이 될까? 법률가들이 틀렸다고 말하는 것을 보니 그렇게 말하는 이들은 현재의 국가 위에 교회가 있다고 믿는 것이 분명하다. 이것이 정치일까 신앙일까..
신앙은 절대 아니다. 정치는 법의 테두리 안에서 정치답게 표현하고 다투어야 하는 것이다. 신앙은 신앙으로서 대답해야 하는 것이 맞다. 교회가 정치에 영향력을 행사 하게 된 것은 사회적 조직과 집단으로서 규모적 위력을 행사하면서부터라 할 수 있다. 예수께서 정치적 입장에서 어중 뜬 결정을 내린 빌라도와 그 문제로 다투지 않으셨다. 당시는 조직의 힘이 없어서였을까? 베드로는 칼로 이 사태를 막으려 했으나 예수께서 그 일을 막으셨다. 주께서 막으려 하셨다면 언급하신 열 두 영을 동원해서라도 막으셨을 것이다. 예수께서 보시기에 그렇게 하는 것이 어떤 이유로든 옳다고 여기지 않으신 것이다. 반면에 헤롯의 부정에 대해 정면으로 맞서는 세례 요한을 볼 수 있다. 어쩌면 두려움에 떠는 사람들을 통쾌하게 만들었을 것이라 믿는다. 그러나 그의 결국은 매우 의미없는 죽음의 자리에 서게 된다.
교회가 나서서 어느 한 편을 지지하는 것, 심지어 그것이 불법인가 아닌가의 문제를 다루는 것까지 나서서 공개된 법적 타당성을 부정하고 있다. 왜 그럴까? 복음이 아닌 지도자인 목회자 한 사람에 의존하는 신앙적 체계로 말미암은 결과라 할 수 있다. 스스로의 생각이 없이 정당의 의견을 따르는 정치인들의 행태와 다르지 않다. 왜?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이 목회자의 입으로 나온다고 믿는 이들이 교회 안에 적지 않다. 목회자를 거역하면 저주를 받는다는 왜곡된 사고가 성도들 의식세계를 지배한다.
성경적 지식이 없으니 유명 목회자에 사로잡힌 수많은 성도들은 자신의 가는 길이 무엇인지 따지지도 않는다. 생각지도 않는다. 올인이다. 자신이 믿고 따르는 목회자가 곧 천국을 보장해주는 것으로 여기는 듯하다. 이것이 오늘날 한국교회의 치명적 약점이다. 성경에 대한 올바른 지식을 갖출 기회를 갖지 못한 성도들은 집단의 이기에 쉽게 빠져들게 된다. 굴절된 신앙관 속에서 정상적 사고와 가치관을 갖기 힘들다. 결국 신앙적 판단이라 여긴 그것들이 신앙이 아닌 다른 것이라는 사고 자체를 갖지 못한다.
교회는 이쪽에도 저쪽에도 서지 말아야 할까? 아니다. 교회는 불법에 맞서야 한다. 그러나 그것이 정치적 목적에 빠지지 말아야 한다. 어려운 일이다. 그래서 교회가 나서는 것이 아니라 개인이 나서는 것이다. 하물며 최근의 일부 교회들이 정치세력과 야합하므로 교회는 더 깊은 수렁에 빠지게 되었다. 성도들이 정신차리지 못한다면 교회는 더욱 깊은 절망속으로 빠져들게 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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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할 사명을 가지고 태어난 공동체이다. 이 복음은 영적 구원에 관련된 것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가난하고 소회된 자들을 위한 메시지와 행동이 함께 들어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가나안을 약속하신 것에는 땅에 대한 약속과 함께 영적 가나안의 의미가 포함된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가나안을 약속하신 것은 그들의 공의나 정직함 때문이 아니라 약속 때문이다.
"네가 가서 그 땅을 차지함은 네 공의로 말미암음도 아니며, 네 마음이 정직함으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이 민족들이 악함으로 말미암아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들을 네 앞에서 쫓아내심이라. 여호와께서 이같이 하심은 네 조상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하신 맹세를 이루려 하심이니라" 신 9:5
그러나 그 땅에 살기 위해서는 그들의 율법에 대한 순종이 요구된다. 그들이 가나안 땅에서 풍요로운 삶을 지속적으로 누리기 위해서 하나님의 법도를 준수해야 하는 것이다. 그렇지 않을 때면 언제든 땅을 상실하게 될 것이다.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땅을 주신 이유가 신명기 15장에 기록되고 있는데 "가난한 자를 없게" 하려는 것이다(5절) [김의원 교수 인용]
"네가 만일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만 듣고 내가 오늘 네게 내리는 그 명령을 다 지켜 행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기업으로 주신 땅에서 네가 반드시 복을 받으리니 너희 중에 가난한 자가 없으리라."
하나님께서는 안식년과 희년의 제도를 통해 그 땅이 쉼을 얻게 하고, 가난한 자들이 자유와 기회를 얻게 한다. 어쩌면 신약교회는 이 모델을 잘 적용한 교회라 할 수 있으며 신약교회의 모델이기도 하다. 거룩한 공동체 교회는 주의 복음을 전할 뿐만 아니라 가난하고 힘없는 자들을 위해 소리를 낼 수 있어야 한다. 거짓되고 악한 것에도 과감히 소리를 낼 수 있어야 한다. 자기의 이권과 관련된 것에만 혈안이 된 교회는 교회라는 이름을 얻기 어렵다.
교회가 세상을 향해 내야 할 소리는 입술로만 외치는 복음이 아니라 그들의 삶속에 함께 하는 공동체여야 하는 것이다. 베드로는 가난한 자들을 구제하는 일에 최선을 다했고, 바울 역시 가난하고 소외된 자들을 위한 헌금을 전달하기 위해 이동하는 장면들이 묘사된다. 교회가 복음전파라는 말을 입술에만 의존할 때 교회는 하나님 앞에 외면 당할 것이 분명하다. 오늘날 한국교회는 복음전파에 목을 매다가 결국 중요한 것을 잃어버릴 수 있음에 귀 기울여야 한다.
GTBC성경교육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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