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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나눔] 로마서 12:9-14 사랑에는 거짓이 없다.

    • 관리자 (gtbc)
    • 2020-09-25
    • hit1313

     


    사랑에 거짓이 있을 수 없습니다. 
    진실함이 없을 때 이미 그것은 사랑이 아니라 위선이며 가증함이며 거짓됨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앞에 삶으로 산제사를 드리는 이의 삶에 거짓됨과 위선이 있을 수 없습니다. 거짓된 모습을 드러내는 순간 그것은 제물로 드려져서는 안되는 것이며 제사의 행위가 되어서는 안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아가페인 사랑은 조건없는 자기 희생을 담보로 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보이신 모범은 진리 사수를 위한 투쟁과 전투가 아니라 진실함으로 보여주는 사랑이었음을 우리는 복음서를 통해 확인할 수 있습니다. 오늘날 어떤 교회들은 왜 전투에 나섰을까요? 왜 권력과의 전쟁에 나섰을까요? 거룩한 진리를 사수하기 위함이라고 말하나요? 사랑엔 거짓이 있을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께서 보이신 모범이 아닌 거짓된 선동과 투쟁은 결국 스스로의 힘을 지키고 보존하려는 진실되지 못한 사심이 담겨 있다고 볼 수밖에 없습니다. 


    사랑에는 거짓이 없습니다. 성도는 악을 미워하고 선에 속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여기의 '미워하다'에 사용된 아포스튀에오는 '부인'하거나 '거절'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악poneron, evil과 싸워서 물리치라는 의미보다는 가까이 하지 않으며 피한다는 개념이 더 강한 어휘라고 보면 됩니다. 언젠가부터 우리 교회가 투쟁의 역사에 뛰어들어 정치를 바꾸고 변화시켜야 하는 것처럼 인식되어 가는 경향이 생겼습니다. 그것은 아마도 교회가 거대한 힘을 가지기 시작하면서부터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을 갖게 됩니다. 사도 바울의 의도가 그런 것이었을까요?

    반면에 선에 대하여는 적극적인 의미의 소속, 즉 선에 연합할 것을 권합니다. 피하는 것과 적극적으로 연합하는 것은 우리 자신이 가져야 할 자세에 대한 가르침이라 할 수 있습니다. 축구와 같은 운동에서는 공격이 최선의 방어라는 말을 하기는 합니다. 신앙은 야고보서 4:7에서 마귀를 향해서는 대적(안디스테미)하라고 하지만 사람들에게서 나타나는 악에 대하여는 가까이 하지 말 것이라권면합니다. 삶에서 부딪는 모든 사안에 대해 성경은 비교적 세밀하게 우리가 가져야 할 자세에 대해 알려주고 있습니다. 주의를 기울이고 살피면 우리가 어떤 상황들에 대해 가져야 할 자세에 대해 교훈을 얻을 수 있습니다. 신령한 영적 예배를 사모하는 이들은 이렇게 말씀에 더욱 집중할 수밖에 없게 됩니다.

    형제에 대하여는 우애를 가져야 할 것을 권하되 사랑으로 할 것을 말합니다. 형제우애는 사랑이 아니면 우애가 있을 수 없습니다. 서로에 대하여는 존경의 마음을 먼저 가지라고 합니다. 존경은 나보다 비교우위의 대상에게만 갖는 것은 아닙니다. 진정으로 존중하고 아끼는 마음이 있다면 모든 사람에게 존경의 마음을 가질 수 있습니다.

    주를 섬기는 일에 있어 게으르지 말고 부지런할 것과 열심을 품어야 할 것을 권면합니다. 어떻게 하는 것이 주를 섬기는 일에 부지런하며 열심을 가진 자세가 될까요? 기록된 말씀에 집중하고 그것을 삶으로 나타나도록 힘을 다하는 것입니다. 바로 앞에 언급한 것처럼 선과 악에 대한 자세가 무엇이어야 하는지 형제에게 대한 자세가 무엇이어야 하는지 또 12절부터 이어지는 여러 환경을 만났을 때 가져야 할 자세는 무엇인지 하나 하나 살피며 확인하고 자신에게 적용시켜 가는 것도 바로 부지런히 열정을 다하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환난이 있을 때 소망 중에 즐거워하며 기도하기를 힘쓰는 성도가 되어야 할 것이며,  어려움 중에 있는 성도들의 쓸 것을 공급하는 것과 손 대접하기를 힘쓰는 것이 또한 사랑으로 해야할 일이라고 말합니다. 가장 어려운 일이 있다면 우리를 직접적으로 박해하는 이들에 대한 자세가 아닐까 싶습니다. 우리를 박해하는 이들을 저주하고 대적하는 일은 쉬울 수 있지만 그들을 축복하고 품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역사적으로 대부분의 시기에 교회는 박해를 받아왔고 심지어 이 복음을 전하고 있는 사도바울의 시대 역시 교회는 존중의 대상이 아니었음을 알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 역시 수도 없는 박해의 현장에서 수없이 죽을뻔한 고비를 넘긴 사람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그런 사람들을 축복하고 저주하지 말라고 말하는 것은 그렇게 하는 것이 좋아서는 아닐 것입니다. 마땅히 성도가 가져야 할 이런 자세를 통해서 더욱 복음이 강력한 위력을 발휘할 것에 대한 기대감과 소망 때문일 것입니다. 우리는 여러 많은 어려운 환경속에서도 누군가를 저주하고 대적하여 싸우지 않습니다. 도리어 그들을 사랑하고 품고 위로하며 그들을 축복하는 성도입니다. 최근 코로나 시대에 정권을 대항해 싸우는 그리스도인들이 마치 정의의 행위를 하는 것처럼 생각하지만 성경은 결코 그것을 옳다고 인정한 적이 없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오늘도 우리의 삶에서 드려지는 산제사가 있고 신령한 예배가 함께하는 오후 되시길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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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나눔] 로마서 15:1-4 약점을 담당하고

    • 관리자 (gtbc)
    • 2020-09-23
    • hit1168

    로마서 마지막장인 16장 전체가 문안으로 마무리 하는 것을 보면 15장이 실질적인 마무리 멘트가 들어가는 것이라 생각할 수 있다. 복음에 관한 또 성도가 갖추어야 할 자세에 관한 상세한 내용을 다룬 책의 마지막장엔 어떤 이야기들이 담겨질까?

    처음 시작은 "(믿음이) 강한 우리가 (믿음이) 약한 자의 약점을 마땅히 담당할 것"이라는 말로 시작한다. 이 서신을 받는 이들이 로마교회라는 것을 생각하면 "믿음이 강한 우리"가 누구를 말하는 것인지 짐작할 수 있다. 믿음이 강하다는 것과 믿음이 약하다는 것의 기준이 무엇인가를 따로 언급하지는 않았으나 본문내용만으로 확인한다면 믿음이 강한 사람은 "타인의 약점을 담당할 수 있는 사람"이라고 정의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관점에서 본다면 누군가가 약점을 보인다면 그는 바울이 말하는 약한자가 되는 것이다. 강한 자와 약한 자의 기준이 모호할 수밖에 없으나 모두가 누군가 앞에서 강한 자가 될 수도 있고 약한 자가 될 수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므로 서로가 약점을 지는 것이 마땅한 일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누군가 자신이 다른 사람의 약점을 보게 되었다면 어쩌면 타인의 약점을 발견한 그는 약점을 드러낸 사람보다 상대적으로 강한 자가 되는 것이며, 이때 그는 자신이 본 타인의 약점으로 인해 회심의 미소를 짓는 자가 아니라 자기를 기쁘게 하는 자리에 서지 말아야 할 것이다. 우리들이 자조적 의미가 섞인 말로 사용하는 말 중에 "타인의 고통은 나의 즐거움"이라는 말이 있다. 이것은 믿음이 강한 자가 가져야 할 자세가 아니라는 것이다. 도리어 믿음을 가진 우리가 가져야 할 자세는 이웃을 기쁘게 하는 것이다. 물론 그 이웃은 나보다 강한 자일수도 있고 나보다 약한 자일 수 있으나 그가 누구일지라도 믿음을 가진 우리 각 사람은 이웃을 기쁘게 하는 일을 위해 선을 이루고 덕을 세우는 자가 되어야 한다.

    여기서 말하는 선과 덕이라는 것이 신앙적 기준으로 무엇인가를 따지는 것보다 보편적으로 인정하는 선과 덕이라 여겨야 할 것이다. 믿는 이들을 바라보는 모든 이웃들이 기쁘게 받을만한 것들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바울은 성도가 이웃을 기쁘게 하여야 할 이유로 그리스도께서 자기를 기쁘게 하지 아니하셨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여기에 바울은 시편 69:9절의 말씀을 인용하고 있다. 극심한 곤경에 처한 다윗의 고백이다. 주를 따르고 사랑하는 자들의 열심이 도리어 자신을 극심한 곤경에 처하게 하는 것을 고백하고 있다. 그리스도께서 고난을 당하신 것 역시 하나님의 백성임을 표방하고 하나님을 섬기는 이들로 말미암은 것임을 알 수 있다. 무지한 백성들의 행동이었으나 주는 자신을 기쁘게 하기 위해 이땅에 오심이 아닌 것을 말하고 있다. 하나님의 의지와 뜻을 위해 자신이 당하는 고난과 곤경을 기꺼이 감내하시는 주를 비교대상으로 올린 것에 우리는 주의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 성경에 기록된 이런 기록들은 무엇이든 우리에게 교훈을 남기기 위한 것이므로 우리가 이런 기록들을 통해 위로를 받을 것이며 인내해야 할 것임을 말한다. 그리고 그 안에서 소망을 갖게 하려는 것인데 그 소망은 오직 주의 뜻이 구현되기를 바라는 소망인 것이다.

    로마서를 기록한 바울 역시 자신이 드러나고 알려지는 것을 바라는 것이 아니라 주의 의지와 뜻이 드러나고 그 속에서 하나님의 계획하신 바가 이루어지기를 소망하며 달려가는 것임을 알게 한다. 그가 당한 수많은 죽음의 위기와 동족의 위협과 고통은 바로 주의 뜻이 실현되기를 소망하며 달려온 것이다. 오늘 우리 믿는 자들에게 주는 교훈이 바로 이것이다. 스스로의 자랑과 기쁨을 위해 신앙생활을 하는 것은 믿음이 강한 자의 모습이라 할 수 없다. 우리가 마땅히 약한 자의 약점을 짊어지고 가야 할 이유는 명백하다. 

    주의 나라가 이 땅에 모든 백성들에게 구현되기를 소망하는 것이다. 할렐루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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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나눔] 로마서 12:1-2 한 번 볼까요?

    • 관리자 (gtbc)
    • 2020-09-09
    • hit1444


    옆 구문의 기역개정 본문입니다.
     
    1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예배니라 2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어쩌면 옆의 구문보다 익숙한 개역개정이 더 편안하게 느껴지는 분들도 계실 것이라 믿습니다. 오늘 처음 만난 한 분으로부터 질문을 받았습니다. "헬라어, 히브리어 전혀 모르는 사람들에게 단어를 말하면 전혀 엉뚱한 소리로 해석을 하고 가르쳐도 모르는 사람들은 끽소리도 못하고 인정해야 하는 건가요? 실제로 그럴 가능성이 큰 것이 사실 아닌가요?" 무엇이라 대답했을까요?

    제 대답은 이렇습니다. "맞습니다. 틀림없이 그럴 것입니다. 그래서 일반 성도들도 기본적인 공부는 할 수 있어야 하고 스스로 성경을 볼 수 있는 능력을 키워야 합니다. 수십 년 교회를 다녔어도 자신이 성경을 잘모른다는 것에 대해 부끄러움을 느끼지 못하는 분들이 많다는 것은 잘못될 가능성이 그만큼 커진다는 것입니다." "그렇기는 하지만 일반 교인들이 그런 것을 어디서 배울 수나 있나요? 교회에서 가르쳐 주지도 않잖아요. 우리교회는 단 한 번도 그런 것 가르쳐 준다고 한 적 없는데요?"

    여러분은 옆에 있는 구문에서 기록된 헬라어가 보이시나요? 한 두개 있기는 하군요. 그러므로의 "쉰"이라거나 목적을 나타내는 "에이스+부정사"의 에이스 정도라고 할까요? 그나마 그것도 이 문장의 이해를 돕기 위한 기능적 키워드 같은 개념이니 모두가큰 의미를 부여하기도 어렵습니다. 물론 스스로 학습을 하거나 공부를 하는 이들에게는 매우 의미있는 기능을 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말입니다. 헬라어를 알아야 할 이유가 있는 것은 분명하지만 헬라어나 히브리어를 몰라도 헬라어를 보는 것처럼 볼 수 있다면 그런 것에라도 집중해야 하는 것은 맞지요? 구문성경은 바로 그런 역할을 하는 것이니 원리만 잘 배워도 엉뚱한 소리를 안하게 된다거나 엉뚱한 소리에 휘둘리지 않을 수 있다고 말씀드릴 수 있겠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여러분이 구문이나 위에 기록된 본문을 읽으며 알 수 있는 정보는 무엇이며 알아야 할 정보는 무엇인지 구분할 수 있을까요? "사람들이 잘 사용하던 말 중에 한국말은 끝까지 들어 보아야 안다"는 말이 있습니다. 끝까지 들어보아야 하는 것은 단지 한국말에서만 통용되는 것은 아닙니다. 성경도 한 두 문장만 읽고 그 의미를 파악하고 말하려 든다면 십중 팔구 다른 소리 할 것이 분명합니다. 오늘 여러분에게 보여드리는 이 본문을 읽으며 다른 소리 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의 내용을 드러낸다면 어떻게 하면 될까요? 말이 어렵군요. 다시 한 번 여쭐까요? 누군가에게 이 본문이 말하려는 것이 무엇인지 설명하기 위해 무엇이라 말할 것인가요?

    토막토막 자르면 이렇게 말할 수 있나요?
    1.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하나님의 자비하심으로 권한다.
    아마 어쩌면 어떤 분은 이것을 둘로 쪼개서 2. 하나님은 자비하신 분이다라고 말하고 싶어질지도 모릅니다. 그 이야기 하려는 것이 아닌 것은 아시지요?
    2. 너희 몸을 거룩한 산 제사(제물)로 드리라. 이것은 하나님께서 기쁘게 열납하시는 것이다. 우리 몸을 산 제물로 드린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요? 
    개역성경에서는 제사라고 하더니 개역개정으로 오니 제물로 바뀌었군요. 제사는 행위가 되지만 제물은 물건이 되는건가요? 그렇다면 우리 몸이 어떤 물건이 되어야 하는건가요?
    3. 이것은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 영적 예배라고 하면 어떻게 예배 하는 것을 의미할까요?
    4.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라. 여기의 본받지 말아야 할 이 세대는 또 무엇을 말할까요? 어렵지요?
    5.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으라. 어떻게 하는 것이 마음을 새롭게 하는 것이며 어떻게 되는 것이 변화를 받은 것일까요?
    6. 너희는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해라. 
    7. 그런데 그 뜻은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다.

    읽기는 두 절을 읽었는데 이렇게 빼놓고 보니 내용이 무척 많아진 것 같군요. 만일 모든 성경이 이런 식이라면 우리는 도대체 그 많은 이야기들을 어떻게 알 수 있는 것일까요? 맞습니다. 만일 성경을 이렇게 공부하는 분들이 계신다면 평생 공부해도 변변한 답변 하나 얻지 못하고 끝날 수 있습니다. 저자가 말하고 싶은 속내의 근처에도 가지 못하고 성경공부한다며 시간만 낭비한 것이 틀림없습니다.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일까요? 도대체 무엇을 말하고 싶은 것일까요? 궁금하지 않으신가요?


    이런 것을 보면 좀 참고가 될까요? 나름대로 더 쉽게 이해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분들도 계시리라 생각됩니다. 영어로 좀 볼 줄 알고 그 의미에 대해 생각해볼 기회가 있으니까 말입니다. 정말 그럴까요? 아니라면 그럼 백일 기도라도 하고 와서 성경을 읽기라도 해야 된다는 말일까요? 여러분이 저자가 말하고 싶은 생각을 이해했다면 아래 리플로 좀 달아주시면 안될까요? 뭐 그렇게 어려운 내용도 아니니 많은 리플이 달릴 것이라고 예상해도 될까요? ^^

    이런 힌트를 하나 드려도 될까요?
    본문이 무엇을 말한 것일까요? 말하고 싶은 것일까요?
    본문이 답을 말할 것일까요? 질문을 던진 것일까요?
    본문이 묵상해야 할 내용일까요? 방향을 제시한 것일까요?

    여기까지 힌트를 드리면 곧 답이 나올 것도 같습니다.

    오늘도 참 좋은 하루였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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