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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생각] 트럼프가 쏘아올린 럭비공

    • gtbc (gtbckim)
    • 2025-1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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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럭비공

    잘못차면 어디로 튈지 알 수 없는 공이다. 바닥에 튀어도 제멋대로 움직이는 모양을 가진 공을 사용하는 럭비, 또 미식축구는 미국사회를 열광하게 하는 스포츠라고 들었다. 심지어 대통령까지 그런 사람으로 뽑을 것이라고는 상상하지 못했다. 언제 어디로 튈지 알 수 없는 그의 행동과 결정사항들은 온 세계를 혼란속으로 밀어넣었다. 막상 힘있는 국가들에게는 큰소리로 엄포를 놓고 아무 것도 하지 못하면서 자신들과 보조를 맞추고 협력하는 나라들에게는 그야말로 착취와 협박에 가까운 행동을 일삼는다. 상식과 공정이란 찾아볼 수 없는 모습이고 더구나 형평성이라는 것은 기대조차 할 수 없는 행동들이다. 자신의 실수를 눈치 채더라도 사과할 줄 모르는 것은 물론이고, 시간이 지나면 더 말도 안되는 공격을 퍼붓는다. 그에게 세상을 향한 공감이라는 능력은 애초부터 존재하지 않았던 것이다. 심지어 자국민들까지도 공격의 대상으로 삼는데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

    안타까운 것은 그의 가장 악랄한 공격대상이 수십 년 혈맹이라 여긴 대한민국이다. 일본과 협작하여 한국에 독박을 씌우려 했던 자가 트럼프이고, 그것을 빌미로 우리의 주력산업이자 가장 뛰어난 분야의 산업들을 통째로 먹으려 한 사람들이다. 다행히 새로 선출된 우리의 대통령은 상식과 공정이라는 잣대로 대응하면서 이 말도 안되는 공격에서 방어권을 행사하고는 있으나 그 버팀이 언제까지 지속될 수 있을런지는 아직 아무도 알 수 없다.

    그의 제안을 거부한 결과가 어떻게 나타날 것인지는 아직 아무도 알 수 없으나, 중국을 빌미로 우리의 주력산업의 핵심에 제동을 가할 능력이 그 나라에 있기는 하다. 그가 마음 먹기에 따라 어떤 결정을 통해 우리의 치명적 약점을 치고 들어올 수 있다는 의미다. 물론 자신도 그만큼 큰 타격을 입을 수밖에 없다는 것을 그가 모르진 않겠지만 말이다.

    럭비공이 만든 세상

    세상은 참 많은 아이러니를 낳았다. 힘이 있다고 하여 스스로 생각한대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다. 러시아는 우습게 여겼던 우크라이나를 공격하면서 궁극적으로는 자국 산업 혹은 국방에 치명적 손실을 입은 상태라고 할 수 있다. 이미 그들은 힘빠진 우크라이나와 싸우면서 제공권 조차도 상실한 것을 연일 드론을 띄우는 것으로 확인할 수 있고, 그들이 자랑하던 수만대의 지상군 공격무기를 상실한 것도 드러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유럽을 향한 그의 위협은 멈추지 않는다. 비록 많은 것을 잃었을지라도 여전히 대량 학살무기를 보유하고 있는 매우 위험한 나라이고, 위험한 지도자라 할 수 있다. 우크라이나 뿐만 아니라 주변의 국경을 맞대고 있는 소국들을 대상으로 공격을 감행하여 나토의 동맹결의를 시험해 볼 수 있는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본래 러시아와 중국은 사이가 좋을 수 없는 나라이지만 현재는 북중러가 밀착하고 있는 모습을 보인다. 큰 전쟁 앞에서는 홀로 싸우는 것처럼 미련한 것이 없다는 것을 저들은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마침 중국도 러시아의 전략과 도움이 필요한 상태라 할 수 있는 것이 호시탐탐 대만을 공격할 기회를 엿보고 있기 때문이다. 대만은 중국 바로 아래, 즉 앞마당에 붙어 있는 작은 땅이어서 주변국들만 잠재울 수 있다면 수일내에 점령할 수 있다는 계산을 한다. 미국은 본토로부터 멀리 떨어진 대만을 지킬 여력이 녹녹치 않다. 어쩔 수 없이 주변국인 일본과 한국에 주둔하고 있는 미군과 동맹들인 한국과 일본, 그리고 호주의 도움을 받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비록 우리는 휘말리지 않겠다고 결의한다고 해도 전쟁이란 예측대로 되는 것이 아니다.

    이스라엘은 쉬지 않고 전쟁의 소용돌이를 멈출 생각이 없고, 미국은 이를 막지도 않을 뿐더러 도리어 부추기는 듯한 인상도 지울 수 없다. 애초에 세상은 전쟁없이 돌아가지 않는 세상이었다. 국지적인 전쟁은 지속적으로 존재했다는 말이다. 2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 한국전쟁, 중동전쟁, 베트남 전쟁, 걸프전 등 다양한 국지적 전쟁이 있었으나 여러 나라가 합류하여 대적하는 대규모 전쟁은 없었다. 국지적인 소규모 전쟁이 아니라면 수십 년 이어져 온 평화는 앞으로 지속될 것처럼 보였다.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하기 전까지 그 누구도 이 평화로운 세상에 러우 전쟁이 벌어질 수 없다고 장담하듯 말했다. 그러나 그 누구도 상상하지 못했던 전쟁은 벌어졌고 수일, 혹은 수주만에 끝날 것이라던 전쟁이 무려 삼 년이나 지속되고 있다. 한 번 터진 전쟁의 기운은 쉽게 사그라들 수 없다. 더구나 진영을 나누어 여러 나라가 간접적으로 개입한 전쟁이 되었다. 만일 전쟁이 멈춘다면 전쟁을 일으킨 나라는 배상의 책임을 회피할 수 없으므로 끝까지 전장을 이어가려 들 것이다. 이스라엘의 네타냐후처럼 말이다. 전쟁을 마치는 순간 자신의 정치생명도 끝나게 된다. 지금 세상은 그 누구도 예측불가한 럭비공 세상이 된 것이다. 이것이 삼차 대전으로 이어지지 않을 것이라 장담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하물며 세계경찰 노릇을 하던 미국도 모든 나라에서 발을 빼고 있는 상황이다. 더 이상 그런 전쟁들을 감당하고 개입 할 능력도 없기 때문이다.

    럭비공을 믿는 교회

    가장 아픈 것은 그렇게 발을 빼고 독주하는 트럼프의 뒤에 서서 그를 지지하고 있는 이들이 또 보수 기독교 지도자들이라는 것이다. 나만 잘되면 남들은 어떻게 되든 상관없다는 이기적 욕망으로 가득찬 종교인들이다. 그것이 신앙의 이름으로 자행되어도 그 누구 하나 문제를 제기하지 못한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신 것은 그런 존재들을 위함이 아니었다. 복음이 이렇게 왜곡되고 굴절될 수 있다는 것도 최근 더욱 뼈저리게 느낀다.

    결국 성경이 말하는 마지막 때의 그 사건들이 먼 미래는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된다. 아직은 평화로운 농촌같이 보이는 땅 므깃도, 아마겟돈에서 이젠 앞으로 어떤 일이라도 벌어질 수 있다는 예상이 얼마든지 가능하게 되었다. 하나님의 말씀을 잃어버리고 자기의 생각에 옳은대로 달려가는 교회 지도자들의 모습에서 마지막 때 방황할 성도들의 혼돈과 아우성이 너무나 선명하게 보인다. 성도들이 정신차리지 못하면 자신의 미래가 자신이 가장 신뢰했던 자들에 의해 유린당할지 알 수 없게 될 것이라는 말이다. 현재 말도 안되는 사이비에게도 수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온 영혼을 팔아버리는 세태를 보면 거룩을 가장한 사깃군들에게 당할 가능성은 백 배, 천 배나 더 크다고 말할 수 있다.

    교회가 거대한 공동체로서의 기능에 의존하려 하는 순간 성도들은 그 공동체의 소모품이 될 뿐이다. 그리스도 공동체가 아닌 종교집단의 한 개체로 존재하게 될 뿐이다. 트럼프가 쏘아올린 럭비공이 온 세상을 혼란과 무질서 속으로 밀어넣고 있는 모습을 보면서 여전히 사람들은 뒷짐을 지고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지켜보자고 말한다. 이 구경이 더 큰 시련으로 확장될 가능성을 이제 배제할 수 없다. 힘있는 정치 지도자 한 사람의 잘못된 판단이 순식간에 세상을 잿더미로 만들 가능성이 농후해진 세상이다.

    만일 그렇게 되어진 뒤 이 어수선하고 혼란한 세계를 평화로 평정할 지도자가 나온다면 크게 환호를 받게 될 것이겠지만, 그것은 또 다른 마지막을 알리는 계시가 될터이니 참으로 안타깝고 답답한 심정이다.

    정말 계시록의 그 때를 향해 질주하는 세상이 지금이라 말해야 할 것인가.. 그렇지 않으면 지금은 결코 아니라고 할 수 있는 세상일까.. 믿는 자들의 영이 깨어있어야 할 때이다.

    GTBC성경교육원장 김강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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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나눔] 올바른 성경읽기?

    • gtbc (gtbckim)
    • 2025-09-30
    • hit2362

    무조건 읽으면 된다?

    우리는 대부분 이런 생각을 갖고 있다. '성경은 그냥 읽으면 되는 것이고, 그 자체가 영감이 있으며 감동이 있고 깨달음을 준다. 그 깨달음은 성령께서 주시는 것이고, 그 깨달음을 따라 사는 것이 믿음으로 사는 것이다.' 그러므로 무조건 많이 읽기에 힘쓰자. 이런 말을 들을 때 참 난감해진다. 맞았다고도 할 수 없고, 틀렸다고도 할 수 없다.

    많이 읽는 것은 권장사항인데, 무조건 읽으면 성령께서 감동을 주시고 깨닫게 하실 것이라는 우리의 생각이 참 순수하기도 하면서 또 위험하기도 하다. 성경은 기록자의 문학적 기록양식을 이해할 수 없다면 기록자의 의도를 이해하기 매우 어려우나 우리는 대부분 기록자의 의도를 파악하는 읽기훈련이 되지 않았고, 교회는 성경의 저자는 무조건 하나님이라고 가르치니, 그렇다면 하나님적(?) 관점에서 읽어야겠는데 그렇게 되면 인간 저자의 기록목적이나 관점은 사라지거나 흐려지게 된다. 또 기록자의 관점을 가지고 성경을 보려하지만 성경의 기록은 오늘날 우리의 사회적 배경과 다른 환경에서 기록되었을 뿐 아니라, 우리가 사용하고 기록하는 문학적 양식과도 다른 방식으로 기록되었으니 또 얼른 와닿지도 않는다. 그러다보니 성경을 몇 번이나 읽어도 이해의 수준은 늘 동일하지만 그래도 이런 저런 내용의 조각들은 제법 읽는만큼 많이 기억에 남게 된다. 또 이것들이 제대로 꿰어지면 다행인데 조각조각 기억나기도 하고 어디쯤에 기록된 것인지조차 가물가물하다. 그러다보면 내가 읽은 것과 기억나는 것을 중심으로 성경을 내멋대로 해석해보기도 하고 때론 그것이 그럴싸하게 보이기도 한다. 이럴 때 우리는 '성령의 감동'이라고 퉁치기도 한다.

    확실히 성경의 읽는 방식은 배워야

    성경을 읽는 것은 좋은 일이나 기왕이면 제대로 읽는 방식을 공부하는 것이 좋다. 신대원에서 가르칠 때 문장을 개요화 하는 방식을 가르쳤다. 한 문장부터 시작해서 단락을 개요하고, 개요한 내용이 다음 단락과 어떤 관계를 갖는가에 따라 타이틀을 붙이기도 한다. 물론 처음부터 누구나 잘 할 수 있는 방식은 아니고(간혹 뛰어난 능력을 보이는 학생도 있다), 혼자 코치 없이 스스로 해볼 수 있는 방식도 아니다. 이런 훈련의 결과 돌아온 반응은 "놀랍다"는 것이다. 알고보니 지금까지 자신이 성경을 제대로 읽은 적이 단 한 번도 없다는 고백을 하게 만든다. 왜 그럴까?

    훈련이 되지 않은 탓이다. 자신이 읽을 수 없었던 것이 아니라 도무지 읽을 수 있는 방법을 배우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것을 우리는 성령의 감동이라고 말하지는 않는다. 성령의 감동은 아직 더 훈련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제대로 구문과 문맥을 보기 시작하면서부터 그동안 알지 못했고 보지 못했던 내용들이 살아 숨쉬듯 튀어나오는 것을 볼 수 있게 된다. 이런 것을 볼 수 없는 이들은 연관 단어나 연관 내용들을 찾기 바쁘다. 그렇게 해서 어떤 결론을 도출하려 하고, 그렇게 얻은 것이 대단한 지식이요 학식이라 착각하게 만들고, 그런 착각에 빠지는 순간 다른 사람들의 생각이나 의견을 전혀 귀에 들어오지 않는다. 많은 사이비들이 발생하는 수법이기도 하다. 그렇게 떼다 붙혀 만든 것을 논리적 전개라고 착각하며 스스로 감동에 빠진다. 그들은 이렇게 말할 것이다. "성령의 감동"이다.

    알지도 못하는 책을 경전이라 부른다.

    성도들은 자신이 읽지도 알지도 못하는 책을 성경이라 부르고 알지도 못하는 내용을 누군가로부터 듣고 맹신하게 된다. 그리고 그 기억을 따라 또 읽고 또 읽는다. 거기에 이런 저런 구절을 암송까지 하면서..(암송이 나쁘다는 것은 결코 아니다. ㅎ) 자신의 믿음을 지탱해주는 가장 확실한 책 성경을 잘 알지 못하지만 올바른 믿음이라고 굳게 믿는다. 우리는 이런 것을 맹신이라고 부른다.

    물론 신학적 전개는 이미 많이 듣고 배웠으니 예수가 누구인지,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성령께서 어떤 일을 하시는지 잘 안다. 논리적으로 설명도 할줄 안다. 그러니 믿음을 가질 수 있는 것이기도 하다. 그런데 그것을 아는 것은 좋으나 그 이후 자신이 어떤 모습의 신앙인이어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문외한이 된다. 삶의 디테일한 부분에 들어가면서 그 믿음이 매우 추상적인 상태가 된다는 것이다. 목적은 하나님의 일이고, 하나님의 나라고, 하나님의 영광인데 디테일에 가면 모든 것이 사라져 버린다. 뭉뚱그려서 그렇다고 믿는 것이 속편한 것이다.

    성경은 분명한 기록목적이 있다

    성경의 저자들은 자신의 기록을 단순히 추상적 개념에 머물도록 하기 위해 기록하지 않았다. 분명한 기록목적을 가지고 오랜시간 고민하며 정리한 책이다. 그의 기록을 읽으며 그의 고민과 기도의 내용을 살필 수 있어야 하고, 그가 말하고 싶었던 부분에 내 자신의 마음도 담아 함께 공감할 시간을 갖는 것이 필요하다. 그러기 위해 그의 기록방식을 철저히 이해할 필요가 있다는 말이다. 나는 일반 성도들에게 TS를 해보시라고 권하지 않는다. 훈련은 누구에게나 고되고 힘들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역에 나서는 이들이라면 모두가 시도할 필요가 있다고 믿는다. 성경을 올바로 읽을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질테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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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생각] 믿음이냐 행위냐의 본질은..

    • gtbc (gtbckim)
    • 2025-09-29
    • hit1856

    믿음인가 행위인가

    이것은 갈라디아서의 질문이 아니라 오늘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에게 내재된 질문이라 할 수 있다. '오직 믿음으로'라고 하는 슬로건으로 개혁주의가 시작되었을지라도 여전히 성도들의 심중에서 이 믿음인가 행위인가의 질문은 살아서 움직인다. 결단코 '믿음으로'라고 대답한 이들도 그들 스스로의 행위의 부족함에 대한 자각이 주는 불편함을 쉽게 떨쳐내지 못하는 것은 도대체 어떤 이유일까?

    오랜 시간 어떤 방식으로든 구약을 접하며 듣고 본 일들은 모두 순종의 축복과 불순종의 저주라는 두 틀의 사고에서 벗어나기 어렵게 했다. 예수 그리스도는 그 구약의 그늘로부터 성도들을 자유케 하였다고 하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우리에게도 몇 가지 벗어날 수 없는 족쇄들이 존재한다. 주일성수를 비롯한 예배와 섬김, 그리고 직분자로서 가져야 할 각종 의무와 규례들은 우리에게 자유가 아닌 족쇄처럼 작용하게 된 것이다.

    그래서 편리하게 생각하자면 '구원은 믿음으로 받고 축복은 행위로 받는다'는 퉁치는 듯한 논리도 나온다. 만일 그렇다면 구원은 축복일까 아닐까? 믿음으로 얻는 구원은 영적인 축복이고, 행위는 육체와 물질적인 축복을 불러오는 통로라 여기는 것일까? 그렇다면 그 행위는 구체적으로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확실히 오늘날 성도들은 이런 저런 고민에서 자유롭기 쉽지 않다.

    확실히 구원을 얻는 것은 하나님의 아들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과 부활을 믿는 믿음이 가져온 축복이다. 이것을 우리에게 허락하신 하나님의 전적인 능력에 의하여 이루어진 역사적 사건이며, 이것은 구약의 율법의 행위와 신약의 은혜의 구원으로 확연하게 구분해준다. 그런데 여전히 우리에게 구약의 규례와 조항들이 따라와 있다. 살짝 형식과 이름만 바뀐 것도 있고, 그 이름 그대로 존재하는 것들도 있다. 신약의 우리가 구약의 그것들을 유지해야 할 것인지, 아니면 무시해도 되는 것인지가 또 다른 곤혹스러움으로 남는다.

    조직공동체로서의 숙명?

    우리는 이런 문제들을 유지하게 만드는 조직organization이라는 틀을 무시하기 어렵다. 교회 공동체는 그리스도 공동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으나 또한 조직 공동체라는 틀을 유지하게 한다. 조직의 유지는 몇 가지 필요한 조항들이 있어야 한다. 그리고 그것을 유지할 수 있는 명분은 구약으로부터 가져올 수밖에 없다. 구약은 조직의 역사이지만 신약의 교회공동체는 구약의 그것처럼 조직적이지도 위압적이지도 않았다. 그러나 신약의 교회가 확대되고 커지면서 규모의 면모를 갖추지 않을 수 없게 된다. 분명한 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보이신 모범을 따르자면 공동체를 유지하는 어려움이 존재한다는 것이며, 바울과 사도들의 전도로부터 시작된 교회들은 지금처럼 거대한 규모의 조직을 이끌기엔 어려움이 있다.

    생각해보면 교회의 비약적 성장은 또 다른 조직의 출현을 막을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 조직의 유지와 발전을 위한 다양한 방책이 구약의 규례들로부터 근거를 찾는 것은 매우 위험한 논리가 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교회의 유지를 위한 방편으로서 믿음이냐 행위냐가 아니라 복음의 원리에 충실한 방법이 무엇인가 하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보이신 교회의 모습은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는 말씀의 원칙을 준수하는 것과 낮은대로 흐르는 경제원리다. 부요가 축복이 아니라 부의 나눔과 흐름을 어떻게 운용하고 유지할 것인가의 문제라는 것이다.

    교회 공동체가 거대해지면 현재의 운영방식으로는 반드시 잉여예결산이 발생하게 되고, 이것을 어떤 방식으로 흘려보내는 것이 맞는가의 원리를 생각해야 하는 것이다. 교회의 부패는 잉여예결산의 적절하지 못한 운용에서부터 시작된다. 구원은 분명히 믿음으로라는 것이 정답이라면 교회의 운용은 적절한 운용으로부터 의로움을 얻게 될 것이다. 구원을 얻은 성도들의 믿음이 거룩한 행위로 이어지는 것은 공동체 단위가 아닌 각자의 삶에서 나타날 수 있도록 이끄는 것도 교회가 숙제처럼 여겨야 할 문제다. 성도가 헌금으로 모든 것이 해결된 것처럼 여길 것이 아니라 자신의 삶에서 마땅히 행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가 깨닫고 행하도록 교회의 리더가 도와야 하는 것이다.

    안타깝지만 규모가 작은 교회는 출발하는 순간부터 생존과 싸워야 하고, 규모가 커지면 잉여예결산이 발생하는 순간부터 목적과 싸워야 한다. 하나님의 목적인가 공동체 자체의 목적인가의 문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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