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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석
뜻밖이라 생각되는 사람이 많을 것이다. 주석이라 하면 특별한 사람들이나 볼 수 있는 책 정도로 아는 이들도 있는데.. 알고보면 성경을 주석한 책이 시중에는 참 많다. 나도 신학교 입학시절에 가장 먼저 구입한 것이 어학관련 책과 성경 주석 씨리즈였을만큼 신학생들에게 주석은 필수항목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최근엔 시중에 나오는 거의 모든 성경책이 주석을 달고 나오다시피 한다. 주석이 상세하게 나온 책을 선호하는 경향이 있다는 것을 출판사들이 감지한 것이다. 판매의 실적을 내기 위해서는 누가 주석한 것인지도 중요하고 얼마나 보기 좋게 만들어지고 자료가 얼마나 많이 들어갔는지도 중요하게 여길 것이다. 이런 주석이 왜 문제가 될까?
그렇다면 주석은 무조건 볼 필요가 없다는 것일까? 아니다.
주석의 성격은 각 절이나 단락마다 단어의 의미를 해석하는 것에 주로 촛점이 맞추어져 있다. 물론 상황을 설명할 때는 배경 사진을 첨부하기도 한다. 가뜩이나 잘 가르쳐 주지도 않고 배울 곳도 없는데 궁금증을 해소해 주는 듯한 이런 주석을 마다할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틀림없이 성경을 전혀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 읽는데 큰 도움을 주는 것은 맞다. 왜냐하면 우리 성경에 사용된 용어들이 꽤 어렵기 때문이다. 또 대부분의 성도들이 용어나 배경에 대한 지식이 전무하기 때문이다. 단락단위로 내용을 설명해주기도 한다. 마다할 일이 없다. 그런데 왜 성경이해를 하는데 주석이 문제가 되는 것일까?
주석은 성경 저자의 의지가 무엇인지를 말해주기 위한 책이 아니다. 신학적 입장을 고려해 해석한 책일 뿐이다. 뿐만 아니라 아는 이들은 다 아는 이야기가 되겠지만 주석은 계보가 있다. 대부분 주석이 여기저기 주석을 활용하여 편집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은 주석은 한 권씩 판매할 수 없는 특징이 있다. 주석은 일반 성도들이 구입하는 책이 아니기에 반드시 시리즈로 나와야 시장성이 보장된다. 필요한 사람은 시리즈로 구입하기 때문이다. 만일 성경을 연구하는 주석을 발간하기 위해 성경66권 중 몇 권을 연구했다면 그 부분은 전문화 하고 자신있게 소개할 수 있을 것이나 나머지 부분은 어쩔 수 없이 크게 문제되지 않는 선에서 적당히 타협한 내용이 될 수밖에 없지 않을까? 주석은 성경을 기록한 저자의 생각을 드러내는 문맥에 대해 크게 신경 쓰지 않는 특징이 있다는 말이다. 사실 주석은 책의 성격을 드러내는 것보다 설교자들에게 도움이 되는 내용이 더 많고, 용도 역시 그런 것이 대부분이다.
아마 눈치 빠른 사람들은 지금까지 소개한 세 번의 내용에서 정작 무엇이 문제인지를 알아챘으리라 생각된다. 문학적 특성에 대한 파악이 우선 되어야 한다는 것 정도는 눈치 챘을 것이다. 저자가 무엇인가를 말하기 위해 어떤 방식으로 글을 쓰고 있는지 그렇게 하여 말하고 싶은 속내가 무엇인지를 발견하는 것이다. 관계 있는 작은 단위가 모여서 중간 단위를 만들고, 중간 단위들끼리 관계를 만들어 더 큰 스토리를 이루어 그 의미를 전달하는 것이다. 아쉽게도 주석은 이런 단위들이 가지고 있는 관계성에 큰 관심이 없다. 주석이 마음에 두고 있는 것은 신학적 사조와 해석이라는 것이다. 어느 교단의 누가 기록한 것인가에 따라 방향이 정해질 수밖에 없다. 물론 그것은 교단의 정책과 사상을 준수하고 지켜내는 중요한 몫이 되기는 한다.
정말 성경을 알고 싶어하는 성도들이 그런 것에 관심이 있을까?
또 그것을 아는 것이 성경을 이해하는 것에 도움이 될 수 있을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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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묵상
지난 게시글에서는 언어의 구조적 차이와 해석에 있어서의 신학적 접근에 대한 언급을 했다. 두 번째로 언급할 내용은 이미 알만한 사람은 다 알고 있는 묵상의 문제에 대한 것이다. 묵상은 큐티를 적용하면서 시작된 성경읽기의 한 방편이 되었고, 이미 저변화 된 것이 사실이다. 본래 묵상은 앞 뒤 문맥과 읽고 있는 책의 전체적인 배경을 근거로 시작해야 하는 것이 분명하지만, 성경을 잘 알지 못하는 일반성도들이 큐티를 통해 익힌 묵상은 단어와 부분에 집중하여 연상 작용을 일으키거나 떠오르는 생각에 머물게 한다. 지극히 주관적인 해석이 될 가능성이 커지며 성경의 본래 의지와는 동떨어진 다른 결과에 이를 수 있다는 위험성이 늘 내재한다.그럼에도 불구하고 누구나 성경을 읽을 수 있는 계기를 가질 수 있다는 전제로 묵인된 면이 크다. 이런 묵상은 한 본문을 가지고 열 사람이 열 개의 다른 결과를 얻게 하는 매우 비효율적이고 비능률적인 방식이다. 놀라운 것은 서로 다른 결과를 말하면서도 은혜가 된다는 이야기도 들을 수 있다. 그러니 묵상을 쉽게 포기할 수 있을까.. 흔한 말로 내가복음이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큐티는 무조건 나쁜 것일까? 그렇지 않다.
시중에 나온 큐티집은 대부분 본문의 범위를 정해주고 본문에 관련된 정보와 사전 지식을 담아준다. 좋은 정보들이 있는 것이 사실이고 가능하면 성경을 읽지 않는 것보다 부분적 정보에 의지해서라도 성경을 읽게 하는 것이 더 좋은 것은 분명하다. 큐티집을 꾸준히 이용하면서 묵상을 즐기는 사람들은 신앙적으로 매우 안정적인 모습을 보이는 것도 사실이다. 여기서 언급한 묵상이라는 것은 이런 사전 정보에 대해 터부시 하고 자의적 해석에 의존하는 묵상에 대한 것을 말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큐티집은 본문의 문맥을 이해시키는 온전한 정보를 제공하기 어렵다. 매일 매일 부분적 지식과 적용에 머물다 보면 문맥적 관점에 대한 앎의 의지가 약해지기 때문이다. 굳이 큐티를 해야한다면 가르치는 사람이 있는 큐티가 좋다. 교회가 범위를 정해주고 그에 관련된 내용과 저자의 생각을 읽을 수 있도록 지속적으로 도움을 주는 것이다. 또 건강한 교사를 통해 연속성을 갖게 도움을 주는 것이다. 신앙생활을 한 만큼 더 성숙한 단계에 이르게 할 수 있는 좋은 방법이 될 것이다. 하지만 대부분의 교회는 그런 연속성을 기대하기 힘들만큼 관심을 갖지도 않으며 열악한 조건을 가지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방법이 없는 것은 아니다. 소규모 조직별로 큐티를 할 수 있게 지도할 수 있는 인재를 양성하는 것이다. 인재양성.. 가장 중요한 일이지만 교회가 크게 신경 쓰지 않는 부분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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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성경의 기록방식 이해
성경은 비록 우리가 읽을 수 있는 한글로 기록되어 있으나 본래의 기록과 몇 가지 다른 부분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기본적으로는 언어적 차이에서 오는 문법과 문장구성방식의 차이와 시대와 문화적 차이가 존재한다는 것을 이해하고 접근하는 것이 필요하다. 특히 성경에 대한 신학적 관점을 학습한 이들은 성경의 문학적 개념에 대해서는 거의 접근 가능성이 차단된 상태에서 시작하는 것이라고 보면 딱맞다. 신학이라는 훈련과정을 통해서 철저하게 선이해의 벽을 쌓으므로 특정한 단어나 용어들 혹은 어떤 내용들에서 모든 생각이 고정된 경향이 생기기 때문이다. 마치 준비된 레파토리를 쏟아내듯 줄줄줄..
이것은 신학이 문제가 아니라 성경의 문학적 구성과 체계에 대한 이해없이 성경을 해석하고 규정해 놓은 신학으로 먼저 성경을 이해해버린 탓이다. 따라서 신학을 전공한 목회자들에게 성경의 문학적 이해에 대한 설명을 할 때는 마치 벽에다 대고 말하는 느낌을 받을 때가 많다. 물론 그런 본인은 무엇이 자신의 문제인지 전혀 인지하지 못한다는 것도 심각한 문제다. 그러나 어쩌랴 이것이 넘지못할 산이 되고 말았으니.. 그렇다고 문학적 이해는 접어두고 문법적 구성에 대한 이해를 갖도록 설명해도 어려움이 있는 것은 마찬가지이고 보니 도무지 방법이 떠오르지 않을 때가 많다. 아는 사람은 다 아는 내용이다. 물론 이것은 수사학적 관점을 언급하기도 전 단계를 의미한다. 그러면 사이비 집단은 좀 나을까? 말해 무엇하겠는가만 정상적인 신학을 졸업해도 되지 않는 일을 말도 안되는 주장으로 일관하는 사이비 집단이 해낼 것이라 믿는다면.. 때로 이런 영역은 신학을 전공하지 않은 일반 성도들이 더 빨리 이해하고 받아 들일 수 있다는 것이 사실이다.
언어[문장의 구성을 포함한]적 방식에 대한 올바른 이해가 없이는 실상 책을 읽으면서도 저자의 생각을 읽어내기는 쉽지 않아 책의 의도와 다른 생각을 할 가능성이 높아진다. 그래서 고민하지 않고 제일 편하게 접근하는 방법이 신학적 해석이라는 방식을 의지한다. 고민할 이유도 없이 외운대로 말하면 된다. 결국 본문 이해의 반복되는 작은 오해가 큰 오해를 만들어 낼 수 있는 소지가 생기는 것이다. 특히 대부분 목회자가 성경을 해석하는 방식이 설교적 접근방식인데 이것은 문맥이라거나 문장의 구성방식에 대한 이해와는 전혀 다른 접근이라 할 수 있고 이것은 본문의 의지가 아닌 설교자의 의지에 맞추어지게 된다. 일반적으로 설교는 단편적이고 부분적인 본문을 가지고 다루게 되므로 문맥의 흐름이나 구성과 동떨어진 전개로 이어질 소지가 다분한 영역이다. 그렇다고 설교 이외에 성경을 배우고 학습할 수 있는 기회가 많지 않다는 것을 생각하면 성도들이 성경의 내용을 정확히 알아들을 수 있는 기회도 그만큼 줄어든다.
많은 신학자들이 말하는 성경은 마치 박제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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