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me 소식
미국의 수업에서
한 대학교에서 사회학 수업을 진행하며 중국에서 유학온 학생들을 앞에 불러 앉혀서 교수가 질문을 한다. 중국에서 온 유학생들은 자국에 대한 자부심에 가득해서 자랑스럽게 내뱉는 말들이 터무니 없으나 본인들은 전혀 그렇게 느끼지 않는 것을 본다. 교수는 이런 저런 질문과 그들이 대답을 통해 자신들이 얼마나 심각한 문제에 빠져 있는지 알게 하려하고 경청하는 수많은 학생들도 그들의 생각과 대답을 들으며 당황하는 기색이 분명하다.
자신들의 문제를 전혀 인식하지 못하는 그들의 모습에서 자유로운 생각을 갖게 되는 것엔 미국유학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무조건 나는 옳고, 내 나라는 옳다는 사고에 젖으면 어떤 행동과 말을 하게 되는지 여실히 보여주는 장면이 아닐 수 없다. 편협한 사람의 사고는 다른 사람들의 생각을 들어볼 생각도 없고 필요조차 느끼지 못한다. 내가 옳다고 여기는 것만 눈에 들어오고 들리기 때문일 것이다. 결국은 누군가에게 이용을 당할 뿐인 것을 모르는 이런 사람들의 모습을 지켜보는 것은 정신 건강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 이런 것은 설득을 통해서도 달라지지 않으므로 자연적 치유의 과정을 지켜보아야 하지만, 그가 소속한 환경이나 역할에 따라 때론 치유 가능성이 거의 없다고 보아야 한다.
신앙의 세계에서
신앙적 사고의 편협함은 더욱 사람을 이상하게 만든다. 우리는 이슬람 세력의 터무니 없는 주장과 테러를 일삼는 모습과 행동들을 보아왔다. 신앙이 다른 외부의 사람들이 무슨 말을 하건 그들에게 들리지 않는 것은 당연하고, 그들이 자유로운 외부세계로 나온다고 해서 신앙적 가치관이나 사고가 달라질 가능성도 희박하다. 정치나 종교적 영향력은 그 자신은 물론이거니와 그 가정과 그 사회에 미치는 영향이 매우 강력하다 할 수 있다.
사이비에 노출된 성도들과 대화를 나누다 보면 이미 다른 논리에 전도된 그 마음을 바로잡기가 얼마나 어려운지를 안다. 그 어떤 말과 설득도 그들에겐 불순한 의도로 이해되고, 그들 생각에 '나도 이미 경험으로 아는 것'이라는 생각 때문에 누가 맞는지 틀리는지 논하는 것 자체가 의미없는 순간이다. 그런 사람들을 만났을 때 적극적으로 설득하거나 바꾸려 시도할 필요가 없다. 시간이 필요할 뿐이다. 먼저 마음이 열리기 전까지는 그 어떤 말도 그에겐 더욱 강력한 반발의 빌미가 될 뿐이다.
심지어 같은 신앙을 가졌어도 정치적 성향이 다를 때 마찬가지로 벽과 벽을 마주하는 느낌이다. 누가 옳고 그른가를 따지기 전에 자기 주장이 먼저 앞서고, 자신이 들은 것과 자료를 신뢰하니 다른 사람의 이야기는 그저 반박의 대상이 될 뿐이고 잘못 아는 것으로 규정될 뿐이다.
그렇다면 서로 마주하지 않는 것이 좋은 것일까.. 답답하지만 때론 기다려야 할 일도 있다.
로마에 보내진 편지
로마에 보내는 편지에 바울은 자신의 답답한 마음을 토로한다. 복음에 대해 굳게 닫힌 동족 유대인들에 관한 마음이다. 그가 어떤 말로 그들을 가르치고 설득하든 그들에겐 씨알도 먹히지 않는 이야기일 뿐이다. 도리어 자신을 죽이려 드는 동족들을 바라보며 참담한 심정에 빠져들 뿐이다. 그런 자기 동족들을 바라보는 바울의 마음은 로마서를 통해 마지막으로 이방인들에게 유대인들의 구원을 위해 역할을 해줄 것을 바랄 뿐이다. 동족을 극도로 사랑하지만 그들로부터 극도로 미움을 받기만 할 뿐이다. 왜 이렇게 되었을까?
자신 혹은 자신의 신앙 또 자신의 민족이 옳다고 믿는 것을 바꾸려 하지 않는 인간 본연의 고집이다. 전통과 조직의 강력한 영향력 아래서 자라는 이의 숨길 수 없는 자기 표현이다. 자신이 알고 있고 자신이 들은 것 안에서 자기가 가장 옳다고 믿는 것이므로 이것은 그 자신에게 모든 것이기에 그럴 수 있다. 누가 이 틀에서 자유로울 수 있겠는가..
목회자들의 생각
지금까지 해온 일들이 아무래도 사역과 관련된 일이므로 수없이 많은 목회자를 만났고 또 앞으로도 만나게 될 것이다. 목회자라는 직업은 세상적인 시각으로 바라볼 때, 그 자체가 이미 편협이라는 옷을 입고 있는 것과 다르지 않다. 그렇지 않고서야 어떻게 목회를 할 수 있을까.. 물론 목회자 입장에선 이것을 편협이라 여기지 않는 것은 당연하다. 내 자신이 신학교를 다닐 때 배운 것은 이런 것이었는데 "신학은 세상의 모든 학문 위에 있다"고 배웠으니 세상 그 어떤 탁월한 학문이든지 신학이 그 위에 있으니 모든 학문을 내려다 보는 것처럼 생각하게 된다. 물론 그 다른 학문에 대해 아는 바가 전혀 없어도 말이다. 그리고 실제로 사역을 할 때 목회자가 아닌 성도라면 나이가 많건 적건, 또 직업이 무엇이든 목회자 앞에 서면 모두가 머리를 조아리고 굽신(^^;;)거리지 않는가 말이다. 착각 위에 서기에 딱 좋은 풍토라 할 수 있다.
신대원 학생들을 지도할 때 있었던 지금도 기억하는 한 문자가 있다.
"무례하시네요." 놀랍게도 내가 50대에 가르치던 20대 후반 학생(중형교회 전도사)이 내게 보낸 문자였다. 보내주는 자료를 통해 성실히 숙제를 제출하던 학생이 내게 더 많은 자료를 요청하기에 다른 학생들과 진도를 맞추는 것이 좋겠다며 자료는 필요한만큼 필요한 때에 보내준다고 하자 돌아온 문자였던 것이다.
"무례하다"
어처구니도 없었지만 아무래도 단어의 사용법을 가르쳐 주어야 할 듯하여 학생에게 답글을 보내주었다. "무례하다"는 말은 "나이 많은 사람이 나이가 어린 사람의 버릇없음에 대해 훈계하고 가르칠 때 쓰는 말이라는 것과 학생이 선생에게 사용하는 말이 아니라고.." 그리고 그런 사고를 갖고 있다면 내게 가르침을 받을 필요가 없다고 했던 기억이다. 교회에서 성도들로부터 언제나 칭찬을 받던 젊은 친구가 자신을 가르치는 이에게까지 그런 문자를 보낼만큼 젖어버린 어떤 문화의 영향이다. 목회자들의 사고가 낮아지기 힘든 이유라고 해야하나? 젊은 목회자들이 사고를 잘 치는 이유도 이와 비슷한 사고의 틀로부터 나온다. 감정이 상하면 심지어 자기 윗사람 들이 받는 일에도 전혀 위축되지 않는다. 정신적인 치료가 필요한 이들이 의외로 많다.
성도들의 생각
교회에 가면 직분이 있다. 직분은 원래 봉사의 직분이라고 말하지만 위치를 정하는 기능을 한다. 장로는 모든 성도들의 선망의 대상이며 존경의 대상일 뿐이다. 직분으로서 누릴 수 있는 역할과 권위가 있다. 상대적으로 낮은 직분을 가진 이들은 그 앞에 낮아져야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일 뿐이다. 하물며 목회자와 성도의 사이는 어떨까? 건널 수 없는 강이다. 겉으로는 성도들에게 그렇지 않은 척하지만 과연.. 아는 사람은 모두 안다. 물론 모든 사람이 똑같은 것은 아니다. ^^;;
성도들은 가장 중요하게 여겨야 할 생각이 자신의 신앙적 성장과 성숙이며 또한 이웃을 향한 섬김과 나눔이어야 한다. 그 섬김과 나눔엔 복음의 나눔도 있지만 또한 사랑의 나눔도 있다. 그러나 대부분 그런 것엔 큰 관심이 없다. 인정받으려는 것과 존중 받는 것에 익숙하고 외형적 꾸밈과 행동에 집중할 뿐이다. 흔히들 말하기를 "본질이 아닌 다른 것에 집착한다"고 한다. 본질은 무엇이고 다른 것은 무엇일까?
세상은 다양하다.
세상은 정말 다양한 사고와 삶의 패턴을 갖고 있다. 그 특성이나 부분들을 묶어 문화라고도 한다. 다양성을 부정하면 독재가 되고 억압이 된다. 무엇이 옳고 그른가의 문제로 싸우면 피곤해진다. 그렇다고 옳고 그름이 없지는 않다. 어떤 관점에서 바라보는가에 따라 논쟁이 되기도 하고 전쟁이 되기도 한다.
상대를 비난하기 전에 상대의 생각이 어떤 과정을 통해서 얻게 된 것인지, 또 어떤 지적수준에서 갖게 된 생각인지 지켜볼 필요가 있다. 목회자든 성도든 우리 모두는 완벽한 지식을 가진 존재들이 아니다. 특히나 편협한 조직속에서만 일상을 보내는 이들의 사고는 단연코 보편적 가치를 갖기 어렵다. 남을 아래로 보는 시각을 가지고는 남을 내 사람으로 만들 수 없다. 분명히 그가 틀렸고 내가 옳다는 확신과 증거가 있을지라도 한 사람의 변화의 과정은 시간이 필요하다. 기다릴 줄 모르는 사회는 전쟁이고 지옥이다.
종종 영국의 유명한 시인이자 극작가 오스카 와일드의 말을 인용한다.
"하나님도 사람을 심판하시기 위해 그가 죽을 때까지 기다리신다."
열기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