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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문학습 - 아래 내용은 컴퓨터에 최적화 되어 있습니다.
오늘은 로마서 11:1절의 구문학습 두 번째를 보겠습니다. 종속접속사의 기능은 주절의 내용을 포함한 문장의 이유나 목적 혹은 결과 등을 나타낼 때 사용합니다.
11:1절에도 이유를 나타내는 종속접속사가 있습니다. 주절은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결코 버리지 않으셨다"는 말을 하면서 그 이유가 무엇인지를 말하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 "나(사도 바울) 역시 이스라엘 사람이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복음을 전하는 자신이 이스라엘 사람임에도 하나님께서 부르시고 사용하시니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버리지 않으신 증거라고 말하고 싶은 것이겠지요? 본래 이스라엘이라는 말 자체가 하나님의 백성임을 상징하는 의미가 있으니 그가 자기 백성을 버리지 아니하실 수 없다는 의미로 들을 수도 있겠군요. 여기에 사도 바울은 두 가지를 덧붙혀 말합니다. 이는 둘다 소유격으로 사용되었고 그 앞에 컴마가 붙어 있습니다. 물론 이런 기호들은 원 사본에는 없는 기능이지만, 전문가들이 이런 기호를 사용하여 독자들이 혼란을 겪지 않도록 해주는 것입니다. 컴마 이후 소유격이라면 주어를 보조하는 역할을 하는 것으로 이해하시면 됩니다.

그 첫 번째 소유격이 아브라함의 씨라고 하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씨인 이스라엘 사람이라는 것이겠지요? 이스라엘 사람 중에 아브라함의 씨가 아닌 사람이 있었을까요? 물론 있을 수 있습니다. 중간에 이런 저런 이유로 합류한 이스라엘인들이 있으니까 말이지요. 그러나 바울 자신은 아브라함의 씨라는 사실을 강조하여 말하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갖는 상징적 의미가 크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그렇다면 이것을 구문으로 어떻게 표현하면 좋을까요? 아래와 같습니다.

주절은 "내가 말한다"이고 그 말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버릴 수 없다는 이야기가 됩니다. 그리고 오늘 다루고 있는 구문인 이유를 나타내는 종속접속사로 나도 이스라엘 사람이니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버리시지 않았다는 근거로 제시하는 본문이겠지요? 더구나 외부에서 유입된 사람도 아닌 아브라함의 씨에서 난 자라는 것을 말합니다. 자부심일까요? 아무튼 좀더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아브라함이라는 이름이 갖는 신앙적 관점에서 보는 상징적 의미는 하나님의 선택이라는 의미도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이들도 역시 신앙적 관점인 선택의 의미로 아브라함의 후손임을 말하기도 합니다. 로마서나 갈라디아서에서 사도바울은 이런 사실을 자세히 설명하기도 합니다.
여기에 사도 바울은 한 가지를 더 추가합니다. 무엇일까요?
자신이 이스라엘 사람이라는 것과 더욱 아브라함의 씨에서 난 가장 확실한 근거로서 완벽한 유대인이라고 말하는 것이겠지요? 그리고 하나 더? 그것은..

또 하나 소유격으로 기록된 베냐민 지파의 이스라엘 사람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베냐민 지파라는 것이 열 두 지파 가운데 더 특별한 의미를 가질 수 있는 무엇인가가 있어서였을까요? 베냐민은 요셉의 친동생이자 야곱의 막내 아들입니다. 그의 어머니 라헬은 베냐민을 낳다가 난산 끝에 죽음을 맞게 되었습니다. 벧엘에서 에브랏으로 가는 도중 그를 낳게 된 것이지요. 라헬의 무덤은 아브라함의 무덤이 있는 곳에 같이 있지 못하고 지금의 베들레헴 장벽 바깥쪽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다윗을 죽이려 했던 사울왕이 속한 지파가 또한 베냐민 지파였던 것을 생각하면 그렇게 자랑스럽게 언급할만한 일은 아닐 듯한데 사도바울은 종종 자신이 베냐민 지파임을 언급합니다. 도대체 그런 이유가 따로 있었을까요? 완벽한 이스라엘 자손이라는 사실을 알려주기 위한 것이기 위한 언급일까요?
아무튼 또 하나의 소유격도 구문에 들어가야 하니 기록하면 이렇게 됩니다.
이유에 언급된 이스라엘 인으로서 드러낸 두 가지 근거엔 아주 절묘한 특징이 보입니다.
그 하나는 아브라함의 씨에서 난 자라는 것이고 두 번째는 베냐민 지파라는 것인데 이것이 갖는 상징적 의미가 보여주는 사도바울의 생각을 읽게 합니다. 그것이 무엇인지는 강의시간에 알려드렸으니 다시 한 번 생각해 보는 것도 의미가 있으리라 생각됩니다.
성경에 기록된 저자의 생각들은 단 하나도 허투루 기록되지 않다는 것과 또 그것이 갖는 문맥적 관점을 넘은 상징적 의미도 내포한다는 것이 놀랍기도 합니다. 단지 상징적 의미로 머물지 않고 이것이 문맥안에 어떻게 녹아들어가는 지를 아는 것은 신비한 일이기도 합니다.
오늘도 주의 거룩한 은혜가 모든 성도들의 삶속에 그리고 이 땅의 코로나 바이러스와 자기고집으로 고통하는 세대들에게도 함께하기를 기도하며 오늘의 강의를 종료하도록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GTBC는 교회가 말씀 위에 세워지기를 돕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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